워싱턴행 아침 비행기
일행이 점심 식사를 마칠 무렵 브라질에서 일행과 낙오됐던 최용석과 지상우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을 본 일행은 마치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보는 기분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최용석과 관계가 서먹했던 김창석 교수와 신중진 교수도 진심으로 두 사람을 반겼다.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되고 숙식을 함께 하면 친구가 되는지 아무튼 일행에서 떨어졌던 두 사람의 결합을 모두 기뻐했다.
정하수 부장이 미소를 가득 띠고 말했다.
“사실 저는 큰 걱정 안 했습니다. 허허. 지사우 과장 혼자 일행에서 떨어졌으면 큰 문제였겠는데, 해외 경험이 많은 최용석 부장이 있었기에 뭐 잘 찾아오리라 믿었지요.”
“예, 하루 차이로 늦었을 뿐이지 별 문제없었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최용석이 답했다.
일행은 두 사람에게 어떤 경로로 합류했느냐, 숙박은 어떻게 했느냐를 물었다. 다들 진심에서 나오는 관심이었다.
뜻하지 않게 마이애미에서 하룻밤을 묵은 최용석과 지상우는 마이애미발 워싱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침 8시에 마이애미 공항에 다시 나왔다. 분주했던 일요일 오후와는 달리 공항은 좀 한산했다.
월요일 아침 비행기는 일요일 밤 비행기와 분위기가 완연히 달랐다. 마치 통근버스와 같은 분위기로 무언가 일을 위해 출장을 떠나는 모습의 승객들로 가득 찼다. 최용석은 호기심 있는 눈빛으로 비행기 내부를 검색했다. 정장을 입은 남녀로 가득 찬 비행기 내부는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약간은 피곤하지만, 다시 보면 어느 정도 기대에 찬 그런 분위기였다. 승객 대부분은 깔끔한 정장에 가까운 복장이었고, 주말의 휴식 이후 다시 각자의 전쟁터로 떠나는 전사들의 모습들이었다. 세계 경제와 정치의 중심 미국, 그중에서도 워싱턴 DC로 가는 아침 비행기에는 경제인들 보다는 뭔가 정치인, 또는 변호사 같은 분위기의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워싱턴 DC는 다른 지역과는 좀 다르다. 대통령과 의회, 그리고 이들과 관계되는 각종 로비단체가 몰려 있는 미국은 물론 세계 정치의 중심.
최용석은 워싱턴 DC를 이전에도 네 번 왔었다. 처음에는 동생과 함께했던 가벼운 여행, 나머지는 출장이었다. 각종 연방기관과 행정기관들이 몰려 있는 지역과 일반 주민들이 사는 지역으로 크게 구분되는 이 도시의 양쪽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원래 미국 건국자들은 새로운 공화국을 세울 때 로마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대통령과 의회, 그리고 법원이 나란히 권력을 나누는 정치체제도 로마 공화정의 호민관과 원로원이 대립하는 관계를 빌려왔고, 사실 각 관직의 명칭 역시 로마식이다. 의회를 비롯한 연방기구들의 건물도 로마식으로 많이 따왔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가 정치 기구가 몰려 있는 중심가인데, 그 길 중간쯤에 최용석의 친구 타이슨 슬로컴의 사무실이 있었다. 180 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의 미남형이었던 타이슨은 퍼블릭 시티즌이라는 시민단체의 유틸리티 담당관이었다. 최용석이 전력산업 자유화에 반대하는 세계의 노동과 시민단체를 물색하다가 퍼블릭 시티즌이 미국 연방의회를 상대로 자유화 반대 입법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직접 연락을 해서 알게 된 사람이 바로 타이슨이었다.
공동연구단이 출범하기 전, 사실 최용석은 김주형 위원장과 김종호 국장이 노사정위원회와 접촉한다는 사실을 모를 단계에 워싱턴으로 날아가 타이슨을 만났다. 당시 한전 전력노조는 다양한 언론기관과 함께 한전 민영화 반대 활동을 벌였다. 그중 하나가 외국의 실패 사례를 발굴해서 국내 언론에 소개하는 것이었고, 최용석이 이 임무를 맡았다. 당시 이미 스위스, 뉴질랜드, 캘리포니아, 캐나다 온타리오 등 막가파식 자유화가 전기요금을 급상승시켰고 대규모 정전사태를 불러온 사례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2003년 8월, 최용석은 한겨레 신문사 기자와 함께 미국과 캐나다를 동행 취재를 했고, 이때 타이슨과 처음 만나 인터뷰를 했다.
최용석과 타이슨은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무엇보다 시원시원한 타이슨의 논리에 최용석이 빠져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타이슨은 방송에도 자주 출연했고 연예인이나 기자에 못지않은 외모와 논리적인 언변으로 미국 연방의회 로비스트 중에서도 꽤나 유명했다.
공동연구단 미국 출장을 준비하며 최용석은 타이슨에게 전화를 했다.
“타이슨, 요새 어때? 하는 일은 잘 되고 있나?”
“어.. 항상 그렇지. 돈 많고 권력 센 사람들하고 다투는 일은 항상 피곤해. 하하”
“아, 그래? 그런 면에서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나 항상 힘들 싸움을 하지. 문제는 권력인데 말이야. 직접 권력을 잡을 수 없으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맞서 싸운 게 항상 어려운 일이지.”
“여기 워싱턴은 요새 상황이 심각해. 전쟁광 부시가 너무 막 나가거든. 우리도 테러를 당연히 반대하지만, 요새 미국 정부는 다른 꼬맹이 테러 조직들보다 더 심한 테러를 저지르거든.”
둘의 전화통화는 30분을 넘기며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었다. 당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가장 큰 뉴스였다. 9.11 테러로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초유의 사태에 모든 미국인들은 분노했고, 분풀이 대상을 찾았다. 배후 조직이 알 카에다라는 사실을 알았고,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던 탈레반은 사실 알 카에다와 사이가 나빴고 탈레반은 9.11과의 관계없음을 호소했지만, 화가 난 미국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은 간단히 미군에게 제압당했고 탈레반은 산속으로 쫓겨났다. 과거 소련군이 실패했던 아프가니스탄 점령은 미군은 단기간에 해냈다. 그런데 알 카에다는 거기에 없었다. 완벽히 조작된 전쟁이었다.
미군의 침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를 가득 채웠던 장사꾼들은 중동의 석유를 노렸다. 바로 이라크였다. 1991년 걸프전으로 이미 초주검이 됐던 이라크를 또 쳐들어갔다. 사담 후세인이라는 독재자가 대량살상무기를 만든다는 핑계였다. 사담은 쫓겨났고 미군은 이라크 역시 점령했다. 그런데 대량살상무기는 없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은 아무런 명분 없는 중동의 석유 패권을 노린 침략이었음은 나중에 다 밝혀졌다.
당시 퍼블릭 시티즌을 비롯한 미국의 시민단체는 당연히 전쟁을 반대했다. 그러나 9.11에 분노했던 미국 시민들은 부시를 적극 지지했다. 분풀이가 필요했다. 평균적인 미국인들은 미국은 정의를 실천하고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모범생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이 세계 평화를 지키는 경찰이고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악의 세력이라고 믿는다. 복음주의 기독교가 이런 믿음을 한층 더 키웠다.
대학생 때 워싱턴을 처음 갔을 때, 제퍼슨 기념관을 둘러보다 최용석은 뭉클한 감동에 눈물이 핑 돌았다. 기념관 벽면을 둘러가며 새겨져 있던 제퍼슨의 어록 때문이었다. 미국 혁명을 이끌고 독립을 쟁취했고 공화국을 건설한 계몽주의 사상가의 어록. 감동 그 자체였다. 그랬던 미국이 세계 패권을 거머쥐자 사상 유례없는 제국으로 변했다.
친구 타이슨은 이런 제국의 심장에서 양심의 소리를 부르짖는 활동가였다. 이제 다시 타이슨을 만난다. 공동연구단 방문 일정에 타이슨, 아니 퍼블릭 시티즌을 당연히 포함시켰다. 1월 13일 오전 일정으로 잡았다. 최용석은 친구 타이슨을 다시 본다는 기대에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