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의 허울을 벗고 오직 진실한 '나'로
오늘의 필사는 최은영 님의 소설, <쇼코의 미소> 중 한 문장입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영화판에서 비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야기는 내 안에서부터 흐르지 않았고 그래서 작위적이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기에 억지로 썼다.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가 정말 절실해,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욕망의 비린내'라는 구절 앞에 한참을 멈춰 선다. 나 또한 이 비린내를 안다. 욕망이 커질수록 나는 그것을 감추려 애썼고, 누군가 그 냄새를 맡을까 전전긍긍하며 부인했다. 순수한 척, 초연한 척, 그렇게 '척'하는 인생을 너무 오래 살았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중요했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컸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각을 어깨가 터질 듯이 부풀려 올려붙였다. 그러기 위해 밤을 버렸고, 나를 버렸으며, 그 외의 모든 것을 버렸다. 대충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엔 적당히 하고 싶은 나약함도 있었다. 노력 없이도 달콤한 보상이 주어지길 바랐던 게으름도 있었다.
누군가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내가 편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불편했던 것이다. 내가 인정받아야 했고, '내가, 내가, 내가...' 그 무수한 '나'를 세워야 했기에 나의 삶은 고달프고 또 고달팠다.
지금 생각하니 참 바보 같은 시간이었다. 이제는 그 허울을 벗어버리고 싶다.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 모든 것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타인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모두를 따뜻하게 챙기는 사람... 그 완벽한 성인(聖人)의 가면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겹겹의 허울을 벗고 오직 진실한 '나'로 서고 싶다. 조금은 실수하고, 때로는 이기적이며, 때로는 차갑더라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이제는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사실 조금 자신이 없다. 이 허울을 다 벗어낼 수 있을까. 너무 오랫동안 뒤집어쓰고 산 탓에 이 껍데기가 정말 나 자신인 것만 같아서. 지금은 그 사실이 가장 두렵다.
교단 위, 분필 가루 흩날리는 공중에는
늘 향기로운 꽃말만 걸어 두었습니다
너그럽고 현명한, 오차 없는 정답의 문장들
그것이 내 몸인 줄 알고 서른일곱 해를 살았습니다
하지만 등 뒤에서는 은밀한 비린내가 났습니다
박수 소리에 취하고 싶던 허기
누구보다 높이 서고 싶던 비겁한 발꿈치
나를 세우기 위해 나를 깎아내던
풀리지 않는 욕망의 눅눅한 냄새
아무도 보지 않는 칠판 뒷면처럼
겹겹의 옷 아래 숨겨둔 이기(利己)를
이제야 바닥에 쏟아 놓습니다
성자의 탈을 벗겨내면
거기, 작고 초라한 한 사람이 서 있겠지요
조금은 차갑고, 때로는 게으르며
남보다 내가 더 소중해 울먹이는
못난 살점 그대로의 나
너무 오래 입어 살갗이 되어버린 이 옷을
살점을 떼어내듯 뜯어낼 수 있을까요
두려움이 비린내처럼 온몸을 휘감지만
그래도 이제는 맨몸으로 숨 쉬고 싶습니다
향기로운 거짓보다는
비린내 나는 진실로, 비로소 나이고 싶습니다.
20260217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