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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Sep 18. 2024

11. 연애의 기쁨 With 팩트남

돌싱 라이프



"루서 님, 어쩜 글을 그렇게 잘 쓰세요. 작가세요?"

"아.. 아니에요. 작가는요..  그냥 스피디하게 후루룩 라면 먹듯이 쓰는 글이라 영양가도 없는 글인걸요. 

그래도 솔직하는 써요." 

처음 만난 분과 부드러운 대화를 하고 있는데 끼어드는 한 마디.

"난 글 안 믿는데, 글이랑 사람이랑 다르던데."


독서 모임에서 20세기에 인기 있었던 오랜 작가의 작품을 이야기를 했던 한 남자가 나에게 던진 첫마디였다. 


"저는 글이 곧 저거든요~"


라고 말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 저분 뭐지?'  내가 글을 잘 쓰지는 않아도, 아닌 걸 꾸며서 쓰는 사람은 아닌데, 초면에 글과 사람은 다르다고 대놓고 말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다. 대충 들리는 이야기를 들으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겠지만, 굳이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자기 생각을 강조를 할 필요가 있을까. 개인의 주관적 경험으로 내린 판단이 정답은 아닌데 말이다. 내 기분을 알아챘는지 그 후 별다르게 말을 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앞으로 태클남을 만날 일은 없겠지. 그의 첫인상은 한 마디로 별로였다. 


추석즈음 뮤지컬 할인 티켓이 생겼다. 할인이 전혀 되지 않는 공연인데 할인이 된다고 하니 사람들과 같이 보고 싶어졌다. 언니들과 함께 보고 싶지만 유부녀 언니들은 추석에 바쁠 게 뻔했다. 명절에 할 일 없는 싱글들. 홀가분해서 좋긴 한데, 온전하게 좋지만은 않다. 며느리들은 나를 부러워하지만, 명절에 뭘 해야 허전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것도 즐겁지만은 않다. 언니들과 함께하지 못할 추석의 뮤지컬. 카페에 글을 올려서 사람들과 어울리기로  했다. 이상한 사람이 신청하지 않기만을 바라며. 


"뮤지컬 보실 분~"

싱글 카페에서 독서모임을 함께 하며 친해진 언니와 오빠가 신청을 했다. 다행이다. 그런데 태클남도 신청을 했다. '그래, 뭐 어때. 첫인상이 좋지는 않았지만 말 그대로 첫인상일 뿐이니까.' 편견은 갖지 않기로 했다.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언니와 친한 느낌이다. 두 분이 커플이신가? 알 수는 없지만 공연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오페라를 보는 남자는 있어도 발레를 보는 남자는 드물던데, 드문 남자들 중 한 명이었다. 


뮤지컬을 보면서도 감탄하는 자세가 공연덕후 못지않다. 감동 포인트도 나와 비슷했다. 공연을 함께 보고 나니, 인상이 달라져 보였다.  삐딱하고 태클 거는 사람보다는 팩트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스타일 같았다. 본인 입장에서는 글과 사람이 다르다는 게 태클이 아니고 팩트였나 보다. 


그 후로도 내가 공연 모임을 주최하면 태클남도 종종 참석했다. 발레도 같이 보고 클래식 연주도 같이 들었다. 공연을 대하는 자세가 진지했다. 공연에 오는 싱글 남자들은 왜 공연에 오시는 건지 모를 때가 있다. 공연을 보고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아이들의 일기처럼 '참 좋았다.' 정도의 감상평 정도만 오갔다.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어떤 부분이 감동적이었는지, 연주는 어땠는지 좀 더 깊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마음대로 된 적은 거의 없었다. 공연을 본 거 맞을까? 그냥 졸지 않았을까? 싶은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공연을 보기 위해 온 게 아니라, 공연에 온 여자들을 탐색하러 온 것이 목적 같았다. 공연 시간을 버티고 난 후,  이성끼리의 어울림을 위해 온 것 같은 남자들. '공연 시간에 피로를 풀고 그 이후 마음에 드는 이성을 찾아보리라!' 아니면 ' 공연 시간에 피로를 풀고 마음에 드는 여성이 없으면 밥이라도 잘 먹고 가자!'가 그들의 전략 같았다.


태클남은 달랐다. 클래식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감상만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악기의 소리도 구분해서 들으며 특성을 비교할 줄도 알았다. 클래식 애호가로 음악을 듣는 귀가 예민했던 전남편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이후 모임에서 밥을 같이 먹기도 했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분들의 일정 때문에 둘이 밥을 먹기도 했다. 7월 모임에서 처음 보았는데 어느덧 겨울.  공연을 보고 밥을 먹는 사이 그에 대한 인상은 달라져 있었다. 팩폭 스타일은 변함이 없는데 태클은 아니었다. 까칠해 보였는데  생각보다 까칠하거나 고집스럽지 않고 순둥순둥하기도 했다. 


"발레 티켓이 두 장 있는데 같이 보실래요?" 남자와 단둘이 공연을 보는 일은 친하지 않으면 거의 하지 않는데,  이 남자와는 같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보여줘서 보는 게 아니라 티켓값을 보냈으니, 썸도 아니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느낌이 살짝 다르긴 했다. 오랜만에 데이트하는 기분?


좋아하는 발레라서 그랬는지, 팩트남과 공연을 보는 것이 좋았다. 연주에 관해서는 그가 더 잘 알아서 오히려 배우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남자로부터 예술에 대한 자극을 받아보는 건 전남편 이후로 처음. 공연을 매개로 대화가 통하는 남자는 인생에서 두 번째다. 몇 년 전에 잠깐 만났던 아저씨와 발레를 봤을 때, 역시 자기 취향은 트로트라고 했다. 굳이 돈 주고 볼만한 장르는 아니라고도 했던가. 발레를 좋아하는 남자, 발레 보면서 감흥에 젖어 행복해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나와 친구 말고는 처음이라 신선했다. 


공연을 보고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여 밥을 먹는데, 부지런히 음식을 가져오는 태도도 호감 포인트. 김치가 없으면 김치를 가져다주고, 야채가 떨어지면 더 가져올 줄 안다. 따스하거나 다정하나 거나 자상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기본은 갖춘 느낌이랄까. 

저녁을 먹고 언니네서 차 한잔을 더 하기로 했다. 

"우리 집과 방향이 달라서 그런지 뷰가 다르네."

"팩트남님 뷰는 어떤데요?"

"여기는 서향이고 우리는 좀 더 남향이니 남향뷰죠." 

혼자 빵 터졌다. 하늘이 좀 더 잘 보인다거나, 공원이 보인다거나... 뭐 그런 뷰의 감성을 물었는데 방향이 달라서 달라 보인다는 사실적 대답이 나는 웃겼다. 아무도 웃지 않는데 나만 웃고 있었다. 그의 팩트가 나에게는 유머 같았나 보다.


1월의 추운 어느 밤. 

맥주를 마시면서 언뜻 느껴지는 그의 시선이 다정해 보였다. 여자 친구 바라보는듯한 시선에서 귀엽다, 사랑스럽다. 같은 이쁜 단어들이 전해진다. 분위기가 달랐을까.

"두 분이 커플이신 거예요?" 

어떤 분이 묻는다.

"아뇨 아뇨~ 저분이 오늘 제 칭찬을 많이 하시네요."

기분 좋게 취한 밤. 버스를 타고 가기 위해 정류장에 기다리는데, 같이 기다려 주더니 잘 들어가라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전화가 왔다. 

"우리 한 번 사귀어 볼까요?"

그의 제안에 딱 하나만 생각했다.

'이렇게 취미가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이 사람과도 연애를 못하면 나는 평생 연애를 못할지도 몰라.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밀당을 모르는 내 대답은 간단했다. 

"네 좋아요~" 


그와의 통화는 사귀는 내내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밤 11시만 되면 어김없이 진동이 울렸다. 평소에는 무음이었지만, 그의 연락을 놓칠까 봐 일부러 진동으로 바꾸어 두었다. 통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흘러 두 시간이 되곤 했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새벽에 일어나는 하루를 감당할 수 있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어느덧 12시가 넘어 다음날이 되어 버리곤 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친해지고 나니 미주알고주알 이야기가 많았다. 나는 기억나지도 않을 것 같은 오랜 과거의 일들도 기억이 선명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 이야기, 20대 연애 이야기도 구체적이었다. '그렇게 많은 인연들을 거쳤는데, 어떻게 다 기억을 하지?' 신기할 정도로 이야기 꾸러미가 많았다.  연애 경험이 거의 없는 나로선 그가 부럽기도 했다. 농담 삼아 그랬다. 

"내가 22번째 여자 맞죠?"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모르는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일, 성인 남녀가 각자의 생각을 조화롭게 말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잘 맞아야 부드럽다. 그와는 쉬웠다. 연애를 하면 반복하게 되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를 기약하면 달콤하되 헛된 대화가 많은데 아니라서 좋았다.  과거의 재미있었던 연애 에피소드. 현생의 고달픔에 대한 이야기들이 별 것 아닌데도 웃음이 났다. 카페활동을 하며 온라인 생활을 공유하다 보니 대화의 소재도 끊임이 없었다.


"너는 애인 스타일이 아니고 아내 스타일이야. 편안해."

애인 스타일과 아내스타일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밀당하지 않고 편안하게 해주었나 보다.  스스로가 이상했다.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낯선 사람에게는 까칠할 때도 있는데 그에게는 너그러웠다. 다른 사람이 하면 기분 나쁠 법한 말들일 텐데 그가 말하면 웃음이 났다. 


강렬한 빨강의 니트 원피스를 입고 갔을 때.

" 빨간 내복 같은 옷을 입고 나왔어"라는 그의 반응이 웃음부터 터졌다.

"아.. 어떤 느낌을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아요" 

주변의 친구나 언니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 않냐고 했다. 내 경험이 아닌 타인의 경험이라면 나도 언니들처럼 말했을지 모른다.  남자가 여자한테 연애초기에 빨간 내복을 입고 나왔냐고 할 수가 있냐며 분개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거지. 왜 웃음이 나지.


내가 그를 많이 좋아하는 건지, 오랜만에 연애를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건지, 그동안 경험했던 사람들과는 달라서 새로운 건지는 모르겠다. 그의 팩폭이 기분 나쁜 적이 별로 없었다. 기분이 나쁜데도 참은 거라면,  매번 기분 좋게 넘어가지는 못했을 테니까. 


주중 하루를  만나서 저녁을 같이 먹고 주말도 늘 함께 했다. 토요일엔 술을 마셨고 일요일엔 공연을 보거나 전시를 보고 밥을 먹었다. 일주일에 세 번을 만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라서 피곤할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이 기다려졌다.  마음이 즐거우면 다 괜찮은 게 맞았다. 몸은 마음을 따라왔다.


같은 J형이라서 그런지 스케줄을 미리 정해놓는 것도 편했다. 나와 어딜 가서 무얼 할까.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했다. 요즘은 그 생각뿐이라며. 아내를 너무 배려하다 보니, 뜻대로 모든 걸 하라는 남자랑 오래 살아서 그런지 그가 미리 알아보고 정한 스케줄에 "좋아요~" 라며 따라가는 것이 마음 가볍고 편했다. 맛집을 많이 아는 그를 따라다니며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신세계. 먹는데 진심이 없어서 식문화에 문외한인 나에게 그의 맛집들은 놀라웠다. 내 식성은 아니더라도 맞춰가며 먹다 보니 맛이 있었다. 가끔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먹기도 했다. 


와인을 비롯한 술에도 관심이 많아서 그가 권하는 술은 다 맛있었다. '이런 세계도 있었는데, 세상을 참 좁게 살았네.' 누려보지 못했던 세상이 새로웠다. 아이들 키우며 알뜰하게 사느라 고급 외식은 머나먼 남의 일. 푼 돈에도 벌벌 떨다 보니 먹는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는데, 30년 만에 해보는 연애 경험은 재미있었다. 그가 아니라면 시도해보지 못했을 닭껍질, 닭발 같은 음식도 자연스럽게 먹었고, 징그럽다고 생각한 곰장어도 별미로 먹을 수 있었다.


그도 나도 취미부자였다. 그는 뮤지컬에는 흥미가 없어서 그를 따라 클래식 공연을 주로 보러 다녔다. 다니다 보니 클래식이 익숙해졌다. 공연을 보고 음악에 꽂히면 다양한 버전을 찾아보거나 반복해서 듣는 그의 수준에는 이르지는 못했지만 같이 공연을 보면서 아름다운 노래와 연주에 눈물을 흘리며 감상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특별했다.


"이 정도면 올인이지 올인~" 

그의 말처럼 온전하게 나에게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매일 카톡을 주고받고,  통화를 하면서 일상을 나누는 일이 마치 오랜 부부 같았다. 애인 스타일이 아니고 아내 스타일이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하게 알 것도 같았다. 


'가만 보니 머리숱이 없어서 신경 써야겠다. 피부 관리도 해야겠다. 좀 더 살이 쪄야겠다. 어울리는 톤의 옷을 골라 입어야 한다... 이 색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잔소리로 들리는 지적들이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그의 애정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나이엔 외모를 관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있는 그대로 봐주면 좋겠는데....' 살짝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사람마다 애정의 영역이 다르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쁘다고 해주니까 괜찮았다. 웃을 때 표정이 특히 좋다고 했다. 지적만큼 칭찬도 하니 팩트맨에게 어울려 보였다. 칭찬만 하는 팩트맨은 팩트맨이 아니니까. 


6개월을 만나는 동안 한 번도 안 싸웠다. 어떤 말에도 신경이 곤두서지 않으니, 싸울 일 자체가 없었다. 우리처럼 안 싸우는 커플도 없으리라 장담했다. 평화로운 우리의 연애를 성격이 좋은 나의 공으로 돌렸다. 싱글카페에서 보면 양다리 걸치며 딴짓하는 사람들도 많던데, 오롯이 상대에게 집중할 줄 아는 사람과의 만남은 축복처럼 느껴졌다. 가끔 터지는 팩폭쯤은 괜찮았다.


"당신"이라고 부르며 편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나는 우리의 관계가 오래오래갈 줄 알았다.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 편안하고 즐겁게 만나는데 오래가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인데 문제가 생길 일이 있을까. 서운할 뻔한 적도 있지만,  마음을 달래주는 포인트가 있었다. 그의 성격을 알기에 적응할만했다.  


서로 알고 지낸 지 6개월, 그리고 사귄 지 6개월 동안 그저 좋기만 했던 우리에게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특별한 걸림돌은 발견조차 못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와의 인연인 오래갈 거라는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맞을 것 같다는 기대와 호감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더 좋아지며 속정이 생기는 기분도 들었다. 


내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인지 확신은 없었지만 함께 하기엔 즐거운 사람이었고. 이런 구도는 쭉 오래갈 게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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