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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Sep 19. 2024

13. - 번외 편 -  한 사람 이야기만 듣는 일

돌싱 라이프

"한 사람 이야기만 듣고 알 수는 없잖아?"


연인 사이의 일이나 부부 사이의 일에 대해 오해하기 싫을 때 종종 하는 말이다. 건너 아는 타인들의 이야기에는 알 수 없는 속내가 많아서 한 사람의 감정에만 동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거란 이성은 작용에 대한 반작용만큼 자연스럽다.  삶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타인의 상처는 내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이미 마음에 편을 갈라놓지 않았다면.  


오래 알아온 내 사람이라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잘 알고 있다면 한 사람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사람의 역사가 가진 힘은 그런 것이다.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며 상대방을 더 힘주어 욕할 수 있다. 오래 보아왔기에 무심코 들었던 단편적인 서사가 짜임새를 갖추고 완성되면 누가 뭐래도 나는 그 사람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다. 시간의 축적이란 그런 것이다.


나만의 감정을 넘어서, 스스로 객관적인 필터를 적용하려고 애쓰거나 이미 상대방의 편에서 한 번 더 생각한 후 이야기를 건넬 때,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처를 받았음에도 상처 준 사람을 보살피는 마음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당시에는 감정이 앞서 내 상처만 보였더라도 시간이 흘러 돌아볼 줄 안다면 오히려 더욱 편들어 주고 싶다. 이미 나는 네 편이었다고.


상처를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감당하는 사람이 제일 멋있긴 하다. 깊은 협곡에서 도움 요청 없이 스스로를 구출할 줄 아는 사람. 상처의 극복은 본인 몫이라지만, 축축한 상처를 남들 앞에 꺼내어 말리는 사람과 축축한 채로 속에 담아두는 사람의 심장 온도는 다를 것 같다. 심장이 칼날처럼 차갑고도 단단한 이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아프면 아프다고 어딘가 쏟아내야 하는 사람은, 꾸역꾸역 참는 사람이 대단해 보인다.


꾸역꾸역 참아낼 줄은 몰라도 필터는 두껍게 적용하려고 애쓴다. 이혼의 상처를 내보일 때도, 살아오며 상처받은 일을 꺼낼 때도 상대방 입장을 헤아리고자 살폈다. 내가 억울하게 당한 일이 아니므로 상대방도 나쁜 사람이 아님을 강조했다. 폭력이나 범죄처럼 일방적인 가해와 피해의 구도가 인간관계에도 있겠지만, 말 그대로 범죄가 아니라면 일방적인 상처는 없는 것. 슬픔과 아픔의 이유가 너 때문 만은 아닌 것이다. 너도 나만큼 아팠기에 돌려받은 것뿐이다. 지나고 나면 결국 내가 더 나쁜 년이었다.


나쁜 년이 미화한다고 좋은 년이 되나. 얼굴도 화장으로 달라지지 않는데  마음티는 더 날 것이 분명하다. 잘 알기에 타인에게 상처를 꺼낼 때는 감정을 빼고 팩트 위주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해왔다고 믿는다.  '정말 그랬을까? 내가 1인칭 시점이 아닌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타인을 헤아렸을까?' 이제는 그마저도 자신이 없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기억해서 전한다고 해서 그게 사실일까? 그 또한 내 의도로 구성된 소설은 아닐까?


상처를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빙빙 돌려서 쓰거나, 행여 오해가 있을까 봐 팩트에 입각해서 쓴다,라고 믿었다.  글로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감정도 정리된다. 객관적인 글쓰기는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생각했다.


"에피소드를 강렬하게 쓰시지 그랬어요? 좀 더 나쁘게  표현했으면 몰입도가 좋았을 텐데. " 글쓰기 수업에서 들은 말이다.

"제가 보이는 글쓰기를 해서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 봐요."  글에 과장을 담지 못해서 밋밋한 글을 쓰는 버릇을 바꾸고 싶다가도 ' 누가 보면 어쩌지? '맞나? 맞았나?' 생각하다가 그마저도 걱정되면 몇 바퀴를 둘러서 쓴다. '잘 모르는 사람은 내 마음을 잘 모르겠구나.' 싶어지면 속이 후련해서 웃는다. 가끔은 강렬하게 사건 묘사를 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교훈이라도 심으려 한다. 그로 인해 의미가 있었노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글 속에 등장하는 타인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일까 봐 걱정스럽기도 하다. 감정문제에는 선명하거나 명백한 구분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섣불리 내린 판단일 뿐인데, 성급하게 표현을 했을까 봐 미안스러워진다. 누군가를 드러내는 일, 글 속에서 표현하는 일은 어렵다.


안 쓰면 되지 않냐고? 아무도 보지 않는 글, 속풀이로 혼자 쓰는 글이라도 이미 나는 글쟁이다. 글을 잘 써서 글쟁이가 아니라, 글 쓰기를 좋아하는 글쟁이다. 글이란 도구를 통해 놀고, 글을 통해 삶을 다진다. 혼자 조용히 써두면 되지 않냐고? 일기처럼 혼자 적어둘 거면 부끄럽게 글쟁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보여주어야 끝이 난다.


타인을 이해하고 싶어서 글을 쓴다. 타인의 의미가 나에게 긍정적이길 바라며 글을 쓴다. 쓰고 나면 글대로 의미가 된다. 방향은 길이 된다. 그 과정에서 나도 가끔은 삐딱하고 싶다. 삐딱하고 싶은 것보다 미화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교훈이나 의미부여보다 나의 아픔을 먼저 공감받고 싶다. 이 정도 아팠다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기도 하다. 다만 미화하지 않은 날 것의 장면이 이미 내 시선일까 봐 두려운 것. 내 시선이 상처가 될까 봐 걱정스러운 것.


걱정스러운 글을 쓸 일이 없길 바란다. 고민 없는 글을 편하게 쓰고 싶다. 열었다 닫았던 글처럼 망설이는 글은 인생에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겪어도 된다.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겪을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다. 밋밋하고 심심하게 사는 것보다는 때론 아프고 슬프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 아픔과 슬픔을 시간이 지나 애도하고 싶을 때, 그 애도가 한쪽의 이야기라고 폄하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글쟁이의 수련이 부족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라면 미안하다. 그러나 양보하고 싶지는 않다. 꽁꽁 숨겨두지 않고 꺼내어 말리고 싶다. 충분한 햇살의 온기를 느끼고, 향기를 품은 바람의 숨결도 느끼고 싶다. 음습한 마음의 곰팡이를 청소해주고 싶다.


한쪽의 이야기. 사람을 알 수는 없지만,  

한쪽의 마음을 응원하고 응원받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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