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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Sep 19. 2024

12. 너는 별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돌싱라이프

모든 연애에는 의미가 있다. 아니, 모든 이별에는 교훈이 있다고 해야 할까. 어떤 이별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한참을 헤아려야 한다. 기절한 것처럼 정신을 잃어버린 상태를 자각조차 못하다가 천천히 회복한다. 깊은 물에 빠져 맥없이 가라앉다가 한참 후에 떠오른 것처럼. 정신을 차리더라도 후유증은 크다. 정신이 들고나서 어디가 어떻게 다친 건지 차분하게 들여다보면 상처의 깊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상처가 깊어서 다친 곳을  다시 벌려야 할 때는 지독하게 아프지만 필요한 순간이기도 하다.      


나에겐 이혼이 그랬다.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짝꿍과의 이별은 가장 강도 높은 지진과도 같아서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렸고, 차린 후에 천천히 의미를 짚었다. 외면했던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자 그와 내가 보였다. 나의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고, 그의 서운함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만 상처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꽤 오랜 시간 상처를 주었음도 자각했다. 모든 선택과 결정엔 '갑자기'가 없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나쁜 놈’이라고 하기엔 나도 ‘무심한 년’이었다.      



이혼 후 처음 연애였다. 처음 하는 연애의 이별은 갑작스러움을 넘어서는 황당함이 컸다. 한 달 전쯤 그가 제안했다.


"우리 생일이 비슷한 시기잖아. 생일 챙기지 말고 그 돈으로 여행 가자. "

참 괜찮은 의견이라 동의했다. 생일 며칠 전. 여행을 가기로 했지만, 만나는 날이 생일이라 신경 쓰였다.


"생일이잖아요. 밥 사줄게요."

얼마 정도를 생각하느냐는 그의 질문에 내 기준에 고급스러웠던 일식집을 떠올렸다.


"그럼 그 일식집 또 갈까?"

"거긴 한 번 갔으니 다른 곳을 가볼까요?"

" 여기 어때?"


그가 말한 장소를 찾아보니 내가 생각한 예상 비용을 넘어선다.

 "아…. 사람들이 참 고급스럽게 먹네요. 이렇게 비싼 곳에서 들 먹는구나."

 이런 좋은 장소는 가족과도 한 번 가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다.


"우리 나이에 이 정도는 먹지. 여기도 싫고, 저기도 별로고. 사귀고 처음으로 당황스럽네."

그의 말에 나도 자존심이 상하며 마음이 혼란스럽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더 좋은 식당을 골라 링크를 보냈다.


"여기 생일 이벤트도 해준대요. 여기로 예약할까요?"     


한참 후에 돌아온 그의 답은 이랬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서운하다 못해 서글프다. 생일에 볼 마음이 사라지니 계속 사귈 마음도 사라졌다. 그냥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그만 만나자.”


 “미안해요...”  

문자도 한 것 같고


“자존심이 상했어요.”

표현도 한 것 같다.


그 또한 “미안하다.”며 마무리를 했다. 문장 몇 개로 마무리했지만, 속으로는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6개월 내내 일주일에 3번을 꼬박 만났던 사람을 몇 문장으로 마무리하기엔 그의 지분이 컸다. 문장 몇 개로 매일의 통화와 수시로 주고받은 카톡, 주말마다의 만남이 칼처럼 정리가 가능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좋아서 만났던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갑자기 이별 통보'를 검색어에 넣어 두드려 보기도 했다. 설명을 읽어내리며 그가 이런 사람이었을까. 맞춰보기도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현재였던 ‘꽁냥꽁냥’의 시간을 과거의 기억으로 돌리는 과정은 아프다. 매일 같은 시간에 걸려 올 전화를 기다리며 설렜던 기분과, 익숙한 음성이 전하는 안부가 평화로웠던 통화의 기억. 그와 함께 갔던 데이트 장소의 이미지, 그와 함께 보았던 공연의 여운이 아파야 하는데, 이번 연애는 달랐다. ‘그’라는 사람 자체가 물음표로 떠올라 사라질 줄을 몰랐다.      


어떤 날은 유독 슬펐다. 갑자기 헤어지자고 하는 그의 태도가 어이없어서라도 그리워하거나 아파하면 안 되는 거라고, 슬퍼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데도 마음이 시큰거렸다. 마음 시린 내가 못났다는 생각에 초라해지면, 남들이 나쁜 놈이라고 하건 말건 그에게는 나만 아는 매력이 있는 거라고, 그는 분명 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버렸다. 연인 사이의 일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기에 아무도 모르는 거라면서.      

미련이 진해지면 '누군가처럼 나도 매달렸어야 했을까.' 생각했다. 헤어지자는 남자 친구의 말에 '네가 뭔데 내 연애를 망쳐!'라는 생각으로 무조건 미안하다고 울며불며 매달려서 마음을 다시 돌렸다는 지인처럼 나도 울며불며 전화하고 집 근처로 찾아가야 했을까. 그랬으면 그도 갑작스러웠던 태도를 후회한다며 나에게 다시 돌아왔을까도 생각했다. ‘아니’란 대답만 돌아왔다. 내가 매달릴 사람도 아니지만, 매달린다고 해서 돌아올 그도 아니었다.      


어느 날은 지질(찌질)했다. "나는 헤어지면 연락처를 차단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서일까. 과음했던 날, 애써 그의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를 누르고, 연락이 안 되자 문자를 보냈다. 차단된 것을 확인하자 카페 내 챗으로 민망한 말들을 보냈다. 내가 한 짓이 현실인지 꿈인지 가물가물해서 다음 날 눈 뜨자마자 폰을 보니, 진상 짓이 가득했다. 이별하면 먼저 연락이라곤 하지 않은 차도녀가 무슨 일을 한 건지, 본인조차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이가 들면 사람이 달라지나. 갱년기가 시작되고, 감성이 풍부해지며 눈물이 많아지더니 이 무슨 지질 함인지. 제대로 ‘이불킥’이 어이가 없었지만 차라리 인간적인 것도 같아 스스로가 애틋했다. 타인들이 보기엔 '별로'인 남자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도 그리워하는 지질한 중년 여성. 마음의 문지기가 연약해서 쉽게 열지도 못하지만, 닫는 것도 어려운 사람. 옆에 누군가 있으면 한없이 허물어지는 사람임을 자각하니, 나라도 나를 토닥여야 할 것 같았다.      


그와의 이별에 의미를 부여해 보았다. 마음의 문지기를 훈련하는 나름의 노력. 이혼하고 난 후 홀가분함이 좋아서 독립적인 삶이 원래 스타일이라고 단정 지었더랬다. 짝꿍과 맞추느라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맞춰주며 함께 지내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오랜 결혼생활이 곧 나였다. 짝꿍과 오손도손 정답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혼자인 시간이 외로울까 봐 애써 주문을 걸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규정하니 새로운 내가 보였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인연의 일을 생각했다. 어떤 인연을 맺으며 살지는 모르겠다. 다만 갑작스러운 이별처럼 갑작스러운 인연이 찾아올 때, 예전처럼 피하거나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이번 이별의 교훈은 이건가 보다.


‘너는 별로였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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