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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Sep 23. 2024

14. 장바구니 썸, 연애

돌싱 라이프

언니의 여동생


제일 친한 인생지기 언니는 4남매다. 그중 오빠와 여동생 둘이 이혼을 했다. 50%의 이혼율. 딱 요즘 이혼 통계다. 오빠는 재혼만 한다면, 친정 엄마의 전폭적인 경제적 지지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여자 자체에 관심이 없다. 아무리 소개를 해준다고 해도 단칼에 자른단다. 짧았던 결혼생활이 호되게 나쁜 기억을 남겼나 보다. 언니의 여동생은 썸만 탄다. 썸의 설렘과 기대를 제일 행복해한다. 썸을 타면 카톡에 멜로망스의 노래가 흐르고 세상은 아름답고 살만한 곳임을 가득 드러내는 프로필이 뜬다. 그런데 썸을 타다가 남자가 스킨십을 시작하며 가까워지려 하면 차단한다. 모르는 사람은 이상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언니를 통해 들은 여동생은 인내심이 많은 착한 사람이다. 그녀의 결혼생활을 알고 나면 왜 남자의 스킨십을 지독하게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자주 썸을 타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직접 만나보니  발랄하고 귀엽고 여성스러우면서도 따스했다. 한마디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장바구니 썸


호감이 살짝 있는 남자였다고 한다. 그 남자도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꽤나 진한 플러팅을 했나 보다.  썸인 듯 보여 설렜던 그녀. 그런데 알고 보니 장바구니 중 하나였단다. 무슨 이야기 나고? 그녀한테만 설렘 가득한 연락을 한 건 아니란 이야기다.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결제는 미루듯이, 마음에 드는 여성들을 썸 목록에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돌싱 세계가 좁다 보니 돌아 돌아 아는 사람 중에 겹치는 장바구니가 있었고, 장바구니 리스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녀에게 했던 플러팅이 가장 썸에 가깝긴 했지만, 그녀에게만 향한 플러팅은 아니었다.


장바구니에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담아두듯 호감이 가는 여성들을 찜해놓고 이 물건을 살까 클릭, 저 물건을 살까 클릭하며 비교하듯이 '그녀들'을 저울질했던 모양이다. 쉽게 구매하는 스타일은 아닌지 막상 연애는 하지 않는 듯 보인단다. 그에게 관심이 없는 누군가에게는 기분 좋은 정도의 친목이었을 테지만, 데쉬를 하면 사귀어 볼까 고민도 했던 지인은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장바구니에 담긴 구매 목록 중 하나. 잠시 장바구니에 머물렀다가 구매되지 못하고 삭제되는 물건이 되는 기분이 좋을 것 같진 않다. 


온리 썸만

돌싱 모임에 처음 나갔을 때, "저는 연애 말고 썸만 타고 싶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땐  그랬다. '아니 굳이 저런 말을.' 돌싱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어떤 의미인지 알 것도 같다. 왜 썸만 타고 싶은지. 그분이 덧붙였다. 나이 들수록 소심해져서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지는 연애보다는 잠시 설레고 마는 썸만 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이제는 이해도 된다. '남자들도 나이 들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어서 적극적이기 어렵다지. 나이 들수록 여성이 적극적이어야 연애도 성사가 된다잖아.' 


기억나지 않는 어느 분의 표현과 함께 언니의 여동생을 떠올리면, 썸만 타는 것도 괜찮겠다. 장바구니에 가득 담은 쇼핑목록처럼 썸목록을 만들어 동시 다발적으로만 하지 않는다면. 가벼운 썸이라도  좁은 세계에서는 나름의 질서와 윤리가 있어야 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고리타분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비교 속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쪽에 배팅을 하는 것이 효율적인데 효율이 어려우니 <썸의 윤리학>에 자신이 없어지기도 한다. 


커플의 유통기한


가벼운 썸이 좋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사귄다면 가볍지 않고 진중하게 사귀고 싶단 생각을 유지해 왔다. 이혼 직후 잠깐이나마 탔던 썸을 떠올려보면, 잠깐의 썸도 이별을 고할 때는 마음이 아팠다. 잠깐이더라도 오만가지 생각이 많아서 혼란스러웠는데 결국 흐지부지되면 기간과 상관없이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앙금처럼 남거나 먼지처럼 쌓이기도 했다.  흔적이 남는 게 싫어서 바로 카톡을 차단하고 연락처를 지웠다. 관계도 감정도 깔끔한 게 좋다면서. 마음이 힘드니까 그랬을 것이다. 짧은 사귐도 힘들던데, 진중하게 오랜 시간의 사귐은 더 힘들고 복잡하지 않을까.


가끔은 중년 커플들의 유통기한이 궁금해진다. 얼마나 사귀고 헤어지는 걸까? 재혼을 하지 않는다면 이별은 정해진 순서인데 그 순서까지 얼마나 갈까. 데이터가 있었으면 좋겠단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한다. 예상하건대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다. 장수 커플은 희귀해 보인다. 중년의 연애는 유독 유통기한이 짧아 보이다. 굳이 짧은 유통기한을 위해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인생 영화를 고르라고 하면  <타인의 삶>을 꼽는다. 보고 나서 잘 잊는 장르가 영화인데 이 영화는 유독 가슴에 남았다. 나를 모르는 타인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포기하면서까지 지켜주었던 타인의 삶.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의 삶을  지켜주는 모습이 뼈저린 감동이었다. 순수한 사랑이 이런 걸까. 인생을 대하는 순결함이 아름다워 뼈저리게 울었던 기억이 오래 남았다.


나란 인간. 참을 수 없도록 가벼운 존재다. 변덕스럽다. 가벼움이 깃털보다 더 하다. 사람은 가벼워도 깃털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참기 어렵도록 가벼운 존재라서 이불킥은 하고 살더라도  예쁘게 살기를 바란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멋지지는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고, 나도 그럴만한 사람이고 싶다. 깊이가 없어 얕더라도, 얕은 속내가 훈훈하고 따스해서 그 마음, 알아채며 살고 싶다.


아름다우면 좋을 법한 남녀 간의 일들이 다르게 보일 때. 고정된 시선이 만들어낸 착각일 수도 있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봐주면 괜찮을 텐데, 괜히 남들 말에 휘둘려 했던 오해일지도 모른다.  썸과 연애만큼 재미있는 이슈는 없고, 전하기 쉬운 남의 말도 없으니까. 신나게 해 놓고 후회하는 것이 남의 연애사이기도 하다. 아름다워야 할 사랑이 흙탕물에 이를 때, 더 흥미진진하다. 요즘 예능프로그램이 돌싱을 주요 소재로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타인의 삶>처럼 중년의 사랑이 지켜주고 싶은 것이라면 좋겠는데,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썸을 타고 연애를 하는 일도 쉽지는 않겠다. '남자 친구는 됐고, 같은 처지의 좋은 동성 친구를 얻을 수 있다면  행운이려니.' 생각을 정리한다.  붓이 살짝 터치를 한 듯, 노란 나뭇잎으로 가을의 시작을 알려주는 풍경을 감상하며 계절 때문에 커져버린 마음의 구멍을 메꾸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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