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서 Oct 02. 2024

뭣도 모르는 인생

방황하는 갱년기


"어려서 뭣도 몰랐으니 결혼을 했지. 남자친구 집이 뭘 하는지, 재산이 얼마인지 조건 하나 볼 생각도 안 하고 사랑했잖아. 우리 이십 대에는. 조금만 세상을 알았더라면 결혼을 했을까?" 


가만 보면, 규모가 큰 일일수록 생각 없이 결정한다. 물건 하나는 꼼꼼하게 따져보고 사면서 내 집 마련을 비롯한 재테크는 공부 없이 막연하게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일을 하며 평생을 살지에 대한 생각은 깊었을까? 어쩌다 보니 하게 된 일을 평생하고 있을 뿐이다. 결혼은 깊이 생각한 걸까? 요즘 분위기처럼 집안 따지고 재산 따지고 직업 따졌으면 과연 했을까? 


뭣도 모르고 결혼하고, 모르니까 아이를 둘이나 낳았고, 몰라서 평생 일을 하고 있다. 알고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살다 보니 살아온 것처럼 몰라서 한 일이 수두룩이다. 내 인생이 이럴 줄 알아서 살고 있나, 모르니까 이렇게 살고 있다. 지금처럼 앞뒤 계산을 할 줄 알면 과거의 나는 그때와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결혼할 거야? 지금의 배우자와 할 거야? 아이는 낳을 거야?" 


같은 인생을 반복할지  쓸데없는 질문을 괜스레 던져보는 일은  다른 선택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정답을 몰랐던 과거의 선택과 알아버린 지금의 선택이 일치한다면 살아온 세월이 행복했다는 증거일 것이고, 아니라면 후회되거나 혹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있는 까닭이겠다. 


모순의 안진진이 떠올랐다. 결혼으로 전혀 다르게 살아온 엄마와 이모의 인생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정답을 몰랐던 엄마와 이모와는 다르게 안진진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고되지만 '나'란 존재가 필요했던 엄마의 억척스러운 삶과 평온하지만 가족에게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이모의 삶을 지겹게 지켜보며 그녀는 현실 예측이 가능한 삶을 골랐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랑보다, 나를 계산에 넣을 줄 아는 남자와 함께 하기로 했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결론이어다. 


인생의 설계도는 창작자의 의도대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 만큼 정확한 정답은 없다. 지나온 시간이 똑같은 조건으로 주어진다고 해도, 어디서 달라질지 모른다. 타임머신을 타고 나만 아는 과거의 지점으로 돌아가더라도 다른 선택을 한다면 내 인생, 의도와 다르게 예상 가능한 규칙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의미도 없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주어진 초기값이 없다 보니,  쉴 틈 없이 직장을 다니며 아들 둘을 양육하느라 고되고 힘들지만  안진진의 엄마처럼 '내'가 필요한 인생을 다시 살까. 바꿀 수 있다면 이모처럼 온실 속 화초로 곱게 살아볼까. 억척스러운 엄마 인생도 별로고,  우아한 안주인도 별로니까 독립적으로 나만을 위해 살까? 


"뭘 좀 알고 난 후의  선택은 달라질까."  쓸데없는 질문에 쉽사리 답을 하기가 어렵다. 두 번은 하기 싫은 고되고 힘든 시간은 맞는데,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내가 누구인가' 규정되지 않는다. 두 번은 하기 싫은 역할을 버리고 새롭게 설계 가능한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정답을 알아버린 지금도 쉽지 않다. 다른 선택도 미지수라 확신이 없기 때문인가 보다. 


얼핏 언니들은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했던 것 같다. 뭘 모르고 했던 결혼과 육아가 좋았나 보다. 언니들의 결혼생활은 내가 옆에서 지켜봐도 충분히 만족할만하다. 무난하고 마음 편한 결혼생활 유지는 행복의  척도로 보인다.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결심은 행복을 기준하는 어떤 지표보다 선명해 보인다. 


뭘 좀 알아도 어려운 게 행복인가 보다. 뭘 몰라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더라도 불행은 아닌가 보다. 뭘 몰랐던 시절로 돌아가 뭘 좀 아는 내가 결정을 다시 한다고 해도 선뜻 명확한 결심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결국 인생이란 모르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나온 시간을 다시 쓸 수 있을 뿐이다. 그때의 불행이 지나고 보니 의미가 있었다며 행복을 부여하며 세탁하는 것은 가능하다. 사건은 달라지지 않지만 교훈은 변한다. 달라진 의미를 바탕에 두고 현재를 체크하고 '앞으로'를 가늠해 보는 것이 최선이다. 


'앞으로'는 여전히 뭣도 모른다. 뭣도 모르니까 현재를 사는 것이다. 현실은 안진진처럼 명확하게 선택할 수 있는 조건조차 흔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몰라서 하는 일은 언제나 수두룩이다. 모르면서 해왔지만 지나고 보니 반복해도 괜찮은 일들도 많다. 정확하게 계산할 줄은 몰라도 어림값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흐릿하지만 내 인생 정도는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은 자각 덕분인지 모른다. 그건 나를 믿는 일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뭣도 모르지만 나를 믿었더라면 안진진의 이모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디폴트값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뭣도 모른다.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결정이건 뭣도 모르는 내가 그래도 괜찮은 선택을 하리라는 믿음이다. 




경의선책거리에서 맥주 한 잔을 하기로 했는데, 비가 많이 온다.

산책하고 시원하게 마시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비가 와서 한적한 실내가 좋은 것, 트인 풍경으로 비 오는 거리를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다고 할까. 각종 아무 말을 지껄이다 보니 내 인생이 재미있더라. 

재미있게 살고 있으니 좀 몰라도 괜찮겠더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