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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Oct 16. 2024

갱년기 인사이드아웃 : 엄마의 빠마머리

방황하는 갱년기


엄마의 짧은 커트머리가 뽀글거리는 빠마머리로 고정되는 순간부터, 엄마는 감정에서 자유로운 사람 같았다. 자유롭다기보다는 감정이 없거나 내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당사자는 그렇게 말한 적도 없는데, 엄마란 사람은 그래 보였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서 알지 못했던 그 시절의 어려움, 살면서 부딪히며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일들 앞에서도 엄마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집안형편이 기울며 나이 들어 시작한 공장일이 3교대라서 힘드셨을 텐데  딸 둘의  새벽 도시락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사는 일이 원래 그런 거라는 듯 동요하지 않으셨다.  엄마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엄마처럼 되는 줄 알았다. 엄마란, 격랑이 몰아치는 변화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당연한 사람이어야 했다. 



엄마가 첫 손주를 본 나이가 되었다. 그때의 엄마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짧은 커트머리를 뽀글거리는 펌으로 볶지 않았고, 몸매도 퍼지지 않았다. 요즘 시대 흐름에 맞춰 자기 관리를 해오다 보니 그 시절의 엄마처럼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 세대를 알 수 없는 패션으로 교묘하게 나이를 감추고 동안이 되려고 애쓴다. 낡은 앨범 속 엄마의 오십 살과 나의 오십 살은  흑백사진과 어플만큼 차이가 크다.



외모는 덜 늙어서 빠마머리는 필요 없는데, 사람에게서 풍기는 성숙함이 없다. 속이 꽉 차서 밖까지 전해졌던 엄마의 아우라는 무심함처럼 보이기도 했고, 누가 뭐라 해도 슬쩍 쳐다보고 고개를 돌릴법할 시크함과도 비슷했다. 바람에 날릴 일 없는 뽀글 머리처럼 딱 붙어서 미동도 않는 단단함이 엄마에겐 있었다. 집을 팔고 전세를 거쳐 월세를 살아도 변함없었다. 양귀자의 소설 '모순'에 나오는 안진진의 엄마처럼 고통의 무게가 있어야 힘을 내는 듯했다. 



엄마는 엄마의 트레이드 마크인 뽀글 머리처럼 살았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변함없는 스타일. 흔들 임이라고는 없어서 일희일비를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딸은 가벼운 바람에도 스타일이 흐트러지는 머릿결처럼 산다. 바람결에 따라 휘날리는 웨이브는 습기 찬 날씨에 곱슬머리의 본질을 감추지 못해서 요통을 치고, 건조한 날에는 더 푸석거린다. 헤어 에센스를 발라도 감출 수 없는 부스스함은 마음의 강도와 비슷하다. 아닌 척, 강한 척 포장을 해도 허술함을 감출 수 없다. 



뮤지컬 서편제에서 서럽게 부르던 넘버, '살다 보면 살아진다'처럼 살다 보면 엄마처럼 되는 줄  알았다. 겪는 일이 다양할수록 감정은 휘발되어 단순해질 거라고 믿었다. 스물은 스물이라서, 서른은 서른이라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일 뿐. 오십이 되면 저절로 지천명을 깨닫고 이순이 될 터였다. 꽃을 피우기 위해 흔들렸을 뿐, 지는 시기까지 흔들릴 필요는 없으니까. 과연 활짝 피어났던 적이  있기나 했는지, 피었기에 지는 것이 맞는지 헷갈리지만 말이다. 



속이 복닥거릴 때, 되뇌었던 말을 떠올려 종알거리면 마음이 평안할 줄 알았다.  '그러려니' 말하고 나면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만나더라도 쿨하게 보내리라 생각했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겉모습은 그래 보였다.  '그게 뭐 대수라고'  한마디 던지면 거슬리는 감정 따위는 물리칠 수 있는 굳센 아줌마가 되리라 확신했다. 중년이 되면 굳이 감추거나 눌러야 할 감정 자체가 사라질 줄 알았다. 평생 고분고분 맞춰온 순종적인 할머니들도 나이가 들면 영감한테 큰소리치듯이 말이다. 



여전히 약간의 변화에도 불안해하고, 까칠하게 굴며, 사소한 일에 당황한다. 시간이 쌓이며 결과가 선명해지니 가지지 못한 것들의 차이가 더 커졌다. 어릴 적에는 보이지 않던 남의 집안 속내까지 알게 되니, 나와 다른 처지의 친구가 부러울 때도 많다. 직설적으로 던지는 한 마디에 마음이 불편해지며 소심해지는 일은 다반사. 당황하고 부럽고 소심한 감정들이 돌보지 않은 마음 구석에 폐가의 먼지처럼 가득한데, 거기에 한 술 더 떠 심심함도 커졌다. 다 큰 아이들은 선심을 쓰지 않는 이상, 엄마와 놀아주지 않는다.  돌봄의 에너지는 남았는데 사용처가 없어서 갈 길을 잃어버렸다.  집 안에서 벗어나 밖에서 잘 놀아보자며 큰맘 먹고  나갔는데, 놀러 나간 놀이터에 친구가 없어서 실망했던 어린 시절보다  더 따분하다. 혼자 그네라도 타고 철봉에라도 매달려 볼까 해서 시도는 하지만 혼자만의 놀이터가 서글프다.



사는 일에 쉴 틈 없이 집중해 온 저력으로 불필요한 것들은 빠른 속도로 정리한 후,  야무지게 묶어 분리수거를 잘할 듯 보였다.  흘러내리는 찌꺼기, 흩날리는 먼지 없는 깔끔한 처리 능력을 갖추었고, 질척거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현재의 나는 예상과 다르다. 찌꺼기와 먼지가 안에서 쌓이다가 한계치를 넘어섰는지, 원하지 않는 감정이 약해진 관절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기분일 때도 있다. 사춘기 때도 이랬던가? 오랜 나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안 본 사이 왜 이리 나이 들었냐고, 관리해야 하지 않냐는 말에 버럭 하고 싶다. 정말 많이 늙었나 싶어서 불안하다. 그러는 너는 뭐 얼마나 동안이냐면서 까칠하게 한 마디 던지고 싶지만, 그렇게 한 마디 던질 대범함이 없다. 속으로 불편해서 말을 숨기고 가만있는 것이 최선이다. 잘 나가는 남의 자식 이야기를 들을 때는 나와 거리가 멀어서 따분한데,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게임하는 아들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버럭 하게 된다. 부부 사이가 좋아서 남편과 여행을 다녀오거나, 남편 카드를 마음대로 긁고 사는 친구를 보면 부럽다. 이혼하지 않아도 부러웠을까? 이혼해서 더 부러운 걸까? 온도차이를 가늠하려는 내가 한 번 더 당황스럽다. 현재 좌표가 '혼자'의 영역이라 그런 건지, 갱년기에는 누구나 비슷하게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심해진다. 나의 갱년기는 사춘기와 다르지 않다는, 아니 사춘기보다 더 하다는 진실만이 확연하다. 



체력 게이지가 낮아지며 덩달아 버럭의 온도는 낮아졌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은 청년과 다르지 않다. 세상은 빠르게 달라지는데 축적된 지식이 없어서 이 상태로 세상을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일은 좀 더 해야 할 텐데, 나의 관리 능력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 직장에서는 꼰대일까 봐 눈치를 보는데, 아니라고 확신할 수 없다. 앞으로 직장생활을 하면 할수록 소심 게이지는 높아지기만 할 예정이다. 내 노후도 빠듯한데, 자녀의 독립과 결혼까지 생각하면 계산이 복잡하다. 복잡해진 만큼 불안은 더 커진다. 라일리를 흔드는 과도한 불안이 가 내 마음을 휘몰아치며 잠식하기도 한다. 여전히 내 마음은 소녀 라일리와 같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하면서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순간도 많다. 외모가 안되면 능력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잘하는 게 있나, 아님 가진 게 많은가. 있는 것 굴려서 살아보는 방법 밖에 몰라서 점점 까칠해진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데, 불안한 곳간이 마음을 넉넉하게 해 줄 리 없다. 현실 여건을 생각하니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아 슬퍼진다. 이런 일로 슬퍼하는 스스로가 또 한 번 당황스럽다.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나를 마주해야 하는 진실이 내키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고 겪어가는 과정은 젊은 시절보다 어렵다.  어릴 때는 어리니까 허세라도 부리며 강한 척을 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페르소나도 쪼그라든다. 통하지도 않는 포장을 하느니 차라리 솔직한 게 낫다. 안간힘을 써서 부여잡기라도 했던 시절과 달라서 포기도 빠르다. 버티는 힘도 줄었다. 보수공사를 하지 못한 마음의 틈은 점점 벌어져서 덜 자란 마음은 금방 들킨다.  사소한 마음 신호에도 오락가락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마음은 엄마 몰래 마이마이로 별밤지기의 라디오 방송을 듣던 때에서 한 치도 자라지 않은 기분이다. 그럴 땐 불안이를 멈춰주는 기쁨이처럼 의지할만한 구석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라일리의 기쁨이가 차라리 나보다 성숙했다는 기분이 들면 스스로에게 버럭 하고 싶어 진다. 




엄마의 뽀글 머리처럼 독한 파마약을 견디고 탄생하여 오래오래 한결처럼 끄떡없는 인생 시즌은 오지 않으려나 보다. 작은 빗방울에도 예민해지고 바람 한 자락에도 흐트러지는 명주실 같은 결대로 살아야 하려나 보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오페라 들으며 눈물 흘리고, 청춘 남녀에게나 어울릴만한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갱년기 아줌마는 혼자만 이럴까 봐 당황스럽다. 인사이드아웃을 보며 라일리와 나를 동일시하는 날들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할까. 



나이는 들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 현재가 건강의 증거이길, 라일리만큼 불안하고 까칠하고 소심하다가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길 바라게 된다. 스스로를 한껏 위로하는 여유와 사치가 가능했으면 좋겠고, 무엇보다 이 시즌도 자연스럽게 흘러서 엄마의 뽀글 머리 빠마처럼 건드려도 아랑곳하지 않는 단단한 날이 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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