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신촌에 간다. 강의를 듣거나, 대여 공간을 이용하기 위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변함이 없어서 고대로인 듯 익숙한 길도 있고, 어렴풋한 기억조차 없을 만큼 낯선 길도 있다. 골목을 다니면 그 시절과 달리서 헷갈리지만 대로변의 풍경은 비슷해서 그 때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30년이 흘러서 많이 변한 듯해도 다정한 추억이 정감 있는 것은 도시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기억이 담긴 공간은 특별하다. 눈부시게 빛나는 인생 한 때의 기억이거나 유난히 아픈 시절의 기억이 남은 곳은 삶의 일부로 애틋하다. 모든 일이 처음이라서 각인된 사건은 시간을 따라 흐르며 각색되지만 장소는 아니다. 사라지지 않은 장소는 변함없는 진실로 남아서 개인의 역사를 증명한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은 흐릿하고, 내가 느꼈던 감정은 어렴풋하지만 그 일이 있었던 장소는 분명한 것. 그래서 추억은 '장소'나 특별한 '오브제'로 존재할 수 있다.
신촌에만 가면 레몬소주를 마셨다. 한창 다이어트에 신경 썼던 이십 대, 배 부르도록 마시는 맥주는 부담스러웠다. 레몬소주는 조금만 마셔도 취기가 올라서 좋았고, 새콤하면서도 달달한 맛이 취향에 맞았다. 우리 시대 가장 인기 있는 술이기도 했다. 레몬액을 타지 않고, 진짜 레몬을 잘게 잘라 꽃병처럼 생긴 투명한 호리병에 담긴 술을 마시면 없던 애정도 싹트며 새로운 연애사를 쓰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소음이 가득해서 대화도 되지 않는 테이블에 앉아 저렴한 안주를 저녁 삼아 먹었던 단골 가게는 어디인지조차 모르겠지만, 시절의 여운은 여전히 남아 있다. 레몬을 떠올리면 침이 도는 것처럼.
신촌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데이트를 하기에 적당해서 자주 놀았다. 만남의 장소였던 독다방이 정신없어서 홍익문고에서 만나곤 했다. 책을 좋아하는 척 눈길은 책에 두고 손으로는 책을 넘기고 있었지만, 오감은 온통 저 너머로 쏠려 있었다. 눈과 손과 뒤통수의 감각이 따로 존재하는 듯했다. 몸의 뒤쪽 감각은 시각 없이도 그가 언제 나타날지를 귀신같이 알아챘다. 뒤돌아서면 서 있는 그, 활짝 웃는 그와의 데이트. 기분 좋은 설렘을 책갈피처럼 남겨두고 신촌 거리를 함께 걸었다.
약속이 어긋나는 날에는 테이블마다 전화가기 놓인 카페로 들어가서 유행하는 비엔나커피를 마셨다. 거품이 녹아서 커피와 하나가 될 때, 삐삐가 울렸다. 음성 메시지가 있는 날도 있었고, 숫자 메시지만 가득한 날도 있었다. 486으로 사랑해를 말했던 날들. 숫자로 의미가 된 삐삐의 암호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사랑의 증표 같았다. 우아한 전화기로 삐삐를 확인하기까지의 시간은 막연해서 지치기도 했지만, 오랜 씨앗의 만개처럼 활짝 피어나기도 했다. 무엇인들 아름답지 않았을까.
반복되는 데이트를 환기시켜 주는 것은 음악이었다. 락카페에 가서 흐르는 리듬에 유연한 몸을 흔들어 대기도 했고, LP음악을 들려주는 바에서 천 원짜리 김을 안주로 시키고 밀러 맥주병을 들고는 유행하는 팝송을 듣기도 했다. 라디오 헤드의 Creep을 유난히 좋아했다. 끼익 거리는 일렉기타의 연주가 심장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다.
팝송보다는 가요에 익숙했던 나에게 새로운 음악과의 만남은 꽤나 괜찮은 자극이었다. 시끄러운 리듬에 소리를 질러대는 락뮤직에 낯설어서 정신이 없다가도 어떤 지점에 이르면 온몸이 찌릿했다. 그와 함께 들으며 몸을 흔들면 레몬소주에 취한 것보다 더 강렬한 취기가 돌곤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며 한국 음악의 지형이 바뀐 지 오래였으나, 이미 유행이 지난 도어스, 너바나, 아바 등의 음악은 가요와 달라서 확실히 신선했다. 감상하는 음악이 협소했던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의 음악 소개는 소중한 가족이상이었다.
그 시절의 락카페나 바는 사라졌다.오랜 전통으로 남은 곳도 있을 텐데, 일부러 찾아간 적은 없다. 가끔은 호탕하게 웃고 시끄럽게 떠들었던 장소들이 그립다. 오랜 밴드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서 발견하는 날에는 반주만으로도 황홀해서 소리 질렀던 그 시절의 향수가 여전하다.
아직 우드스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보고 싶었다. 예전처럼 영혼을 반쯤 풀어버린 듯 몸을 흔들며 놀지는 못해도 오랜 팝송을 LP로 듣고 싶었다. 요즘 팝송에 다시 꽂힌 언니들, 콜드플레이 콘서트 예매를 하고 웨스트라이프 콘서트에 예매대기를 거는 언니들이라면 가고 싶어 할 것 같았다. 예상은 딱 맞아떨어졌다.
LP판이 가지런히 진열된 가게로 들어가서 낡음을 감상했다. 오랜 맥주 가게는 맥주 쩐 특유의 냄새가 있는 편인데 이곳도 그랬다. 테이블에는 낙서가 가득했다. 아주 오래 전의 낙서가 아닌데도 그 시절인 듯 반갑다. 평일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꽤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들 대화를 하면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모습이 비슷해서 웃음이 났다. 우린 콜드플레이와 라디오헤드, 너바나, 웨스트라이프 음악을 신청해서 들었다. 귀가 예민하지 못한 우리들에게는 공덕역 주점에서 유튜브 영상으로 모든 신청곡을 다 틀어주었던 기억이 더 달콤하긴 했지만, 공기를 음악으로 가득 채운 낡은 공간에서 맥주와 마른안주를 씹으며 의미도 없는 말들을 내뱉고 주워 담은 시간 또한 이십 대의 어느 날처럼 유쾌했다.
조용필의 가요를 듣고 자랐다. 이문세, 변진섭의 노래를 들으며 사춘기를 보냈다. 입시의 쓴 맛을 부활과 김광석의 멜로디로 위로받으며 컸다. 난생처음이었던 서태지의 음악을 대학 가서 접했다. 6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록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호기심을 키웠다. 인기 절정이었던 한국 발라드를 들으며 청춘의 애환을 삼켰고, 사랑과 이별의 시간을 달랬다. 사는 일이 정신없어서 잠시 음악을 잊었다. 숙제를 얼추 끝냈다는 해방감에 잊었던 음악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추억이 깃든 오랜 음악부터 들어본 적이 없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는 요즘은 비빔밥 속에서도 맛있는 나물의 고유한 맛을 느끼듯 전혀 다른 듯하면서도 유사한 음악의 매력에 빠져 지내는 중이다.
록뮤직과 가요에서 시작된 호기심은 뮤지컬을 거쳐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연주 등 클래식에 이르게 되었다. 음악으로 성장해서 음악에 따라 추억의 장소를 만들었던 한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음악과 함께 살아간다. 잔나비와 검정치마, 데이식스의 요즘 음악과 KPOP의 중심인 방탄소년단의 노래, 조성진과 임윤찬의 연주, 오페라 아리아, 그리고 재즈와 탱고. 음악에는 과거의 내가 있고, 그 과거를 소중하게 여기는 현재가 있다. 미래의 내가 과거로서 오늘의 나를 조우한다면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더 은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