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한강 작가 작품 분석
한강의 작품
1. <질주>에서 동생 진규는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집단폭행으로 죽었다. 인규는 동생이 맞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의붓아버지가 가게를 비우면 안 된다며 교육했기 때문에 바로 달려가지 못했다. 진규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인규는 달리고 또 달린다. 연약한 동생이 구타의 대상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심각하게 인지하지 못했던 인규는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했다. 주인공이 11살 때 농약을 마시고 죽은 아버지의 자살이나 동생의 죽음에 인규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구할 수 있었음에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 분간하지 못한 어리석음은 인규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인규는 의붓아버지와 사는 어머니가 동생 진규를 잊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궁암에 걸린 어머니가 수술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진규를 다시 낳고 싶은 소망에 있음을 알게 된다. 어머니는 진규를 잊지 않았고, " 다시 너를 낳고 싶구나. 나에게 돌아오겠느냐?"라고 표현한다.
2.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어느 날 꿈을 꾼 후 육식을 거부한다. 노브라 상태로 다니는 그녀를 사람들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처럼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채식을 선택했을 뿐인데 영혜의 부모님은 사위에게 사과를 하고 딸에게 고기를 억지로 먹이려고 실랑이를 벌이고, 아버지는 고기를 거부하는 딸을 급기야 때리고야 만다. 육식과 속옷을 거부했을 뿐인 영혜는 환자가 된다.
3. <소년이 온다> 광주를 겪지 않은 작가가 생생하게 80년 5월 18일을 기억한다. 친구가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도 도망간 동호는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시신들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들은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중학교 3학년으로 이러한 일을 하는 이유는 친구 정대의 시신을 찾기 위함이다. 동호는 정대를 찾기 위해 도청 민원 봉사실을 향했다가 은숙과 선주를 돕기 시작했는데 결국은 친구 정대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대는 소설의 1장에서 어린 새로 표현된다. 5,18 현장의 폭력이 선주와 은숙 그리고 작가의 에필로그로 리얼하게 묘사된다.
4. <작별> 어느 날 갑자기 눈사람이 된 주인공은 스물넷에 아들을 낳고 홀로 십 년째 아이를 키워왔다. 그녀는 직장에서 인턴 직원으로 만난 7세 연하의 가난한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 직원을 소모품처럼 대했던 직장에서 가장 버리기 편한 소모품이었던 인턴 남자친구는 한 달 만에 일을 그만두지만 월급조차 제때 받지 못한다. 그녀도 두 달 뒤 권고사직을 당한다. 싱글맘과 취준생이라는 취약한 존재인 이들에게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다.
<채식주의자>에서 식물성을 꿈꿨던 주인공은 아예 사물이 된다. 주인공은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몸에 속해 있지 않다고, 그 주변의 어떤 사물이라고 상상”한다. 주인공은 사회적 아픔에 크게 공명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백남기 농민의 죽음과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키는 사건들을 악몽으로 꾸며 고통을 나눠 앓는다. 특히 지난 삼 년 동안은 죽은 아이들의 꿈을 되풀이해 꾸었다. 겹겹이 흰 천으로 감싼 수백 명의 아기들의 시신을 차례로 종이 상자에 담으며 그녀는 벌벌 떨었다.
5. <작별하지 않는다>는 화자이자 소설가인 경하가 폭설이 내리는 제주도로 향하며 전개된다. 꿈에서 본 풍경이 자신이 소설로 썼던 광주의 학살에 대한 것이라고 여긴 경하는 제주에 사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친구 ‘인선’과 함께 이를 영상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지만 수년간 진척되지 못했다. 어느 겨울날 서울의 한 병원에 있는 인선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는다. 인선은 홀로 통나무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며 제주 집에 홀로 남겨진 앵무새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폭설을 뚫고 도착한 인선의 집에서, 경하는 70여 년 전 제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얽혀 있는 인선의 가족사를 마주하게 된다. 소설은 그렇게 경하의 이야기에서 인선의 이야기로, 또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작품의 특징
1. 폭력
한강작가의 작품에는 우리 시대의 폭력이 들어있다. 폭력 자체가 작품의 거대한 구조를 이룬다. 사회 현상을 비유적으로 드러내어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문학이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보편적 성질일 수 있겠으나 한강 작가는 그 폭력을 보다 세밀하게 다루며 집중한다. 초기 작품에서 폭력은 개인적인 폭력에 기인한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어 본 것은 아니나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폭력은 가정생활에 기인하거나 소규모 그룹에서의 폭력이었다. 그 이후 '채식주의자'에서 드러나듯 역사에 기인한 거대한 폭력이 아닌 미세한 폭력을 주제로 삼았다. 미세한 폭력이 지닌 존재의 파괴성을 작가는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시대를 대변하는 소설가의 역할에 충실한 듯 사회의 구조적 폭력은 작품마다 존재했다. 그 폭력은 '소년이 온다'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1980년 광주의 이야기를 직접 겪지 않은 작가는 마치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한 듯 사실적으로 광주를 보여주었다. 최근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제주 4.3에 대해 서술한다. 한강 작가는 개인이 개인에게 휘두른 폭력부터 사회의 구조적 폭력, 만 연화되어 잘 보이지 않는 교묘한 권력, 국가가 개인에게 휘두른 폭력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며 다짐하는 노란 리본처럼 작품 속에 배치한다.
2. 꿈과 혼
한강 작가의 작품에는 유난히 꿈이 빠지지 않는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의식적으로 억압하려 했던 무의식적인 요소들이 꿈속에서 표출된다. 무의식적 요소들은 흔히 불안을 일으키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왜곡 또는 치환된 형태의 꿈으로 나타난다. 결국 꿈은 의식적으로 잊으려 했던 기억의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작가는 이 꿈을 과거와 연결되었거나 혹은 보고 싶지 않아서 눈감고 싶었던 사회적 현상들을 설명할 때 차용한다.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을 하게 된 이유는 꿈에서 시작되며, '작별'에서도 공감능력이 뛰어난 주인공의 꿈에 세월호나 백남기 사건이 습관처럼 등장하곤 한다. 또는 '혼'이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소년이 온다'에서 정대의 죽음은 혼으로 알 수 있다. 그 혼의 생명적 상징은 '새'가 되기도 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새가 등장하는데, 연약한 새를 살리기 위해 친구 대신 제주를 가게 된 경하는 4.3을 마주하며 '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으로 존재의 정신세계를 정직하게 지배하는 것이 꿈이며 존재의 가장 마지막을 증명하는 것이 '혼'이라고 생각한다. 즉 존재에게 정신성이 있어서 그것을 대변할 수 있다면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꿈과 혼일 것이다. 꿈에서도 잊지 못하고 혼으로라도 남야야 하는 아픔. 한강작가는 시대가 기억해야 할 사회적, 시대적 아픔을 꿈과 혼으로라도 부여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잊어서는 안 되는 폭력을 쉽게 잊고 사는 우리들에게 고통을 꿈으로 느끼게 한다. 과거에 존재했던 고통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고통의 기억은 꿈으로 가능하다. 꿈은 실재하지 않는 감정을 정확하게 '몸'이 느끼도록 하는 또 다른 실재이자 경험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가능하지 않은 고통, 아픔, 슬픔, 불안 등이 꿈을 통해 구체적으로 구성된다. 작가는 꿈으로 표출된 존재의 고통을 새, 혹은 혼으로 자유롭게 풀어주고자 한다. 새가 되어 날아가거나 혼이 되어 산자와 교감하도록 한다.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타자(산자)와 고통의 한가운데 있었던 존재인 혼과의 교감을 통해 폭력과 고통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3. 몸
한강 작가의 작품에는 폭력에 대한 '정동'이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정동이란 의식을 매개할 시간적 여유 없이 바깥의 자극이나 정보가 다이렉트하게 신체를 촉발하는 현상이다. 도덕적인 시민들의 깨어있는 의식이 아닌 몸의 반응, 관계의 감정에서 생겨난 몸의 반응이 '정동'인데 이는 행동능력의 연속적인 변이를 의미한다.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향하는 변화로 동일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것이 되기를 원한다.
한강작가의 작품에서는 작품마다 등장하는 폭력에 대한 정동이 몸으로 의미된다. '질주'에서 인규는 동생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달리고 또 달리는 형태로 표현한다. 인규는 숨이 멎을 듯한 달리기를 통해 죽은 진규와 동일시된다. 인규는 진규가 죽던 순간을 반복하면서 그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취한다. 동생이 당했을 폭력의 고통이 인규의 몫이 되는 방식은 몸의 활동인 '달리기'에 있다. 또한 아들을 잃은 모정의 아픔은 몸에 생긴 병을 제거하지 않는 것으로, 다시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명에 대한 잉태로 표출된다. 아픔이 관념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체화된다.
'채식주의자'에서도 고기를 거부하고 먹지 않는 의지가 말라가는 '몸'으로 표현된다. 여성성을 억압하는 속옷을 착용하지 않는 것, 그래서 유두가 드러나는 것 또한 몸의 방식이다. 작가가 페미니즘을 말하는 거라면, 그 방식이 관념적이지 않고 신체로 작동된다. '몽고반점'에서 집착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신체의 일부, 몽고반점이다.
'소년이 온다'를 추동하는 치욕, 분노, 고통, 증오, 수치, 죄책감, 슬픔 우울 등은 서사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것이다. 소설 속에서 다양한 정동의 조건과 양상은 동호, 진수, 선주, 정대, 선주, 은숙 등 개별 인물 각각의 신체에 할당되어 있다. 몸은 더 이상 개별적, 인격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동호와 진수. 이들이 먼저 죽은 이들에 대한 죄책감, 수치를 끊어내는 방법은 스스로의 몸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만 제시된다.
'작별'에서 주인공은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벌레처럼 실제 눈사람이 되어 따스한 체온을 나눌 수 없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잡으면 눈사람의 손이 녹아서 사라지고, 키스를 하면 입술이 사라진다. 감정의 동요로 눈물이 흐르면 눈이 지워지고 가슴에 뜨거운 사랑이 솟구치면 심장이 녹아 몸이 꺾이게 된다. 꿈을 통해 시대의 아픔에 미세하게 공명하는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따스함에 노출되는 순간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몸을 잃어야 한다. 약자에게 거만한 사회에서 약자들과 공명하는 존재는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눈사람으로서 가능하다. 실직을 당하고 수도권 변두리에서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혼녀의 존재감은 '사람의 몸'으로 존재할 수 없다. 잠시 눈사람으로 머물러 따스함이 작동될 때마다 녹아 사라져야만 한다. 꿈을 통해 약자의 고통에 민감했던 그녀는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눈사람의 몸으로 잠시 세상에 머문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경하는 제주에서 한 겨울에 내리는 눈을 온몸으로 경험한다. 불빛하나 없는 제주의 마을을 밤새 눈과 함께 걸으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 든다. 눈 속에 파묻혀 정신을 잃은 경하는 다른 곳도 아닌 제주의 눈을 통해 죽음을 경염 한다. 경하는 '세월호'라고 짐작되는 사건을 목도하며 슬퍼하거나 분향소를 방문하는 단계에서 끝내지 않는다. 옷을 입은 채 욕실에서 계속 물을 맞는 몸의 경험으로 고통을 자발적으로 느끼고자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전극이 죽은 전지처럼 죽은 듯이 지낸다. 고통의 깊이는 감정의 언어로 묘사되지 않고 몸의 언어로서 표상된다. 작가는 아픔과 고통이 몸을 통해 실재하기를 원한다
4. 기억
한강 작가의 작품에서는 기억이 살아 있다. 그 기억의 현재화는 가장 가까운 인물이 맡게 된다. 형제간 부모자식 간 나아가 친구 간의 동일시 모티프를 근간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작중 인물들은 죽은 이들을 내면화 한채 마치 그들의 생을 대신하듯 살아간다. 예민하고 죄의식 많은 주체는 자신의 곁에 상존하는 죽은 자들로 인해 생의 감추어진 이면을 감지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한 사람의 심리적 상태가 두 별개의 존재에 의해 표상되기도 한다.
작가의 작품에서는 자아와 무관해 보이는 외부의 타자가 죽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아의 경계를 뚫고 침입해 들어오기도 한다. 자아의 내부로 틈입한 타자는 자아에 균열을 일으킨다. 들뢰즈가 말한 진정한 주체화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탈주체화라 말한 대목과 상통한다.(들뢰즈 개념어 사전) 마치 도플갱어와 유사한 분신 같은 타자가 무의식의 과거를 소환하여 주체가 자신 안에 내재하는 새로운 현재를 살게 한다.
과거는 현재와 동시적으로 구성되며, 시간은 매 순간 현재와 과거로 이중화된다. 연속되는 시간에서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현재가 아니며, 현재는 결코 과거와 단절되어 있지 않다. 들뢰즈는 지각하지 못한 채 과거로 흘러들어 간 모든 기억들을 '잠재성'이라고 일컫는다. 따라서 과거를 어떤 과정, 즉 질서 지어진 조건들 혹은 원인들의 계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과거는 활성화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들의 전체라고 주장한다. 이 잠재성은 현재를 생성하는 힘이다. 우리의 현재 삶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과거를 근간으로 생동하고 있는 것이다.
'질주'에서 인규가 지치도록 달리는 행위는 과거 진규의 죽음을 지속적으로 현재화하는 행위이다. 진규의 억울한 죽음은 과거로 물러난 사건이 아니라 살아남은 인규의 생에 무차별적으로 침투하는 현재적 사건이다. 인규는 죽은 진규와 동일시된다.
'소년이 온다'에서 작가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1980년이 아니라 1983년의 여름, 아홉 살이 아니라 열두 살의 여름. 비록 연도에는 혼동이 있었지만 그 계절의 감각만은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에서야 비로소 내가 왜 연도를 착각했는지 깨달았다. 나의 내면에서 이 책이 80년 광주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1980년 아홉 살의 내가 문득 생각했던, 그 여름을 이미 건너지 못했으므로 그 가을로도 영영 함께 들어갈 수 없게 된 그 도시의 소년들의 넋이, 내 몸속 어딘가에 새겨졌다는 것을..' 또한 2009년 용산 망루가 불타는 모습을 보며'저건 광주잖아'라고 외친다. 현재의 사건이 과거의 기억을 추동한다. 과거는 잊힐 수 없는 현재로서 존재한다. 작가에게 과거에 대한 기억 상실은 존재에 대한 부정과도 같다.
5. 연대
'채식주의자'에서 영혜는 육식을 먹고 싶지 않았을 뿐이고 여성의 몸을 구속하는 미세한 억압을 거부했을 뿐인데 폭력의 대상자가 되고 환자가 된다. 가장 소극적인 투쟁이었음에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역사적이며 거대한 문제가 아닌 개별성에 대한 이해임에도 불구하고 타자에 대한 이해는 없다. 육식은 우리 사회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일반화된 미세한 폭력으로 의미되는데, 작품에서 폭력을 거부한 존재에 대한 거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또한 처제의 몽고반점을 탐하는 형부를 아내이자 언니인 인혜는 보고도 못 본 척한다. 작가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 작품의 특징은 현재와 맞물린 과거를 기억하는 타자가 일관되게 존재한다.
'질주'에서 진규의 죽음을 기억하며 달리기를 통해 진규와 하나 되는 형, 인규가 있고 '소년이 온다'에서 정대의 죽음을 차마 잊지 못하는 동호가 있으며 자신의 집에서 살았던 동호를 기억하는 작가가 있다. '작별'에서는 부당하게 해고당하고도 월급을 받지 못한 남자를 품어주는 가난한 이혼녀가 있고, 그 가난한 엄마가 눈사람이 되어가는 걸 걱정하며 사랑하는 아들 윤이가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엄마의 4.3을 기억하며 역사의 고통을 현재의 영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딸 인선이 있고, 인선을 기억하는 친구 경하가 있다. 그들이 어느 부분에서는 혼이 되어 날아들고 어느 순간에는 '새'로 표상되며, 어떤 장면에서는 몸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경험된다. 폭력의 고통이 주인공의 개인 경험에서 그치지 않고 기억을 따라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전이된다.
이것은 관념적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가벼운 '기념'이 아니라 내 몸에 새겨 죽음으로 지키고 싶다는 선언으로 다가온다. 가족사로 인한 개별적인 고통은 고통의 역사를 알고 있는 가족이, 국가의 폭력과 고통은 차마 그 고통을 눈감지 못한 주변인들이 '더 이상의 모욕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지막까지 몸으로 기억하려고 애쓴다. 한강작가는 진정한 연대, 시대적 연대는 관념적인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몸의 고통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듯하다.
몸으로 세세하게 느끼며 고통에 공명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연대로도 의미된다. '소년이 온다'에서는 그날을 이렇게 기억하기도 한다.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여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 누군가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실재했듯이, 한강작가는 나의 고통이 아니더라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기억을 통해 연대를 말하고자 한다.
한강작가의 시대적 의미
70년대 이전 출생한 여성 작가로서 공지영 신영숙 은희경 정경린 등은 격변하는 시대 변화에서 남성중심적이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여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여주었다. 여성의 삶을 부각하여 남성의 일부 혹은 보조하는 역할로 존재했던 여성을 중심부로 내세웠다. 21세기 최근 여성작가들은 사회의 다양한 문제점들을 톡톡 튀는 스토리로 재미있게 들려준다. 최은영, 정세랑, 김초엽, 정류진 등 새롭게 등단한 젊은 여성 작가들은 그동안 여성작가로서 함께 분류되었던 구분에서 탈피하여 자신만의 개성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서정적인 감성이 유난히 빛나거나, 받아치는 문장의 재미가 쏠쏠하거나 유머를 넘어선 위트가 넘치기도 한다. 새로운 신예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작가의 결'이 분명하다는 인상과 함께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에 자극을 받기도 한다.
한강작가의 경우는 70년대생 작가로서 등단한 지 오래되었으나 개인적으로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고 난 후, 알게 되어 뒤늦은 존재감으로 인해 요즘 신예 여성 작가들로 인식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요즘의 신예 여성작가들과는 작품의 분위기나 '결'이 다르다. 한강의 작품은 젊은 작가들의 "톡톡 튀거나, 말랑말랑하거나, 위트 있거나, 단단하거나"로 압축할 수 있는 감상과 달리 과거 20세기 등단한 작가들에게서 느꼈던 묵직함이 있다. 세밀하고 미세한 부분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어 천착을 거듭하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내는 감성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그녀는 현재의 문제를 입으로만 가볍게 입으로만 떠들지 않는다. '이것이 문제, 저것도 문제'라며 입으로만 나불대는 작가가 아니라 무겁게 가라앉아 숨이 막히기 직전에 떠올라 뱉어내는, 죽기 직전의 짧은 숨. 뱉어내야만 살 수 있는 숨을 어렵게 어렵게 뱉어낸다. 차마 다 뱉어내기 어려울 때는 꿈을 통해서, 혹은 죽은 혼을 통해서 산자에게 전한다. 과거에는 상처 투성이었으나 이제는 낡아서 기념하는 것조차 촌스러운 역사를, 그래서 의도하지 않게 역이용당하는 역사를, 산자들이 투덜대고 불평불만하는데 이용하는 사건들을 그녀는 끝까지 기억하고자 한다. 그 사건이 어떤 것이었고 그 역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산자의 '몸'을 통해 잊지 않으려고 한다.
부당하고 억울하고 슬프고 아픈 고통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톡톡 튀는 개성으로 '세련'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혼자 낡아 있는 듯하다. 세상은 온통 한낮의, 한 여름의 햇살 속에서 부산스러운데 혼자 겨울을 산다. 그런데 그녀가 전하는 겨울이 밝고 명랑한 햇살보다 따스하다. 그녀의 겨울에는 늘 눈이 온다.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눈송이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흔적은 공기 속에서 다시 순환된다. 그녀가 전하는 겨울의 기억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눈송이는 어렵게 내뱉은 숨이 공기 중에 살아 있는 듯 진동하는 힘이 있다. 그녀의 문학은 사람들의 가슴에 시린 겨울의 한으로 남았다가 날카로운 눈의 결정에 심장이 찔릴 때즈음, 눈송이로 허공을 날아다니며 심장을 데운다.
한강 작가는 잊히기 쉬운 우리의 고통을, 역사가 지닌 한을, 반복해서 되풀이되는 아픔을 끝까지 잊지 말기를 당부한다. 그녀는 우리 시대에 기억으로 실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