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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서 Oct 13. 2024

똥인지 된장인지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어서 당황스러울 때, 책을 찾아보며 탐색한다. 모든 지혜가 책에 있을 것 같지만, 딱 맞는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나에게 잘 맞는 경우를 책에서 발견했다고 해도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문자로 접한 통찰이  정답을 제시해주지 않을 잘 알고 있다. 이론과 실재는 다르다.  책은 해결을 해주기보다는 위로를 해 줄 때가 훨씬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를 삶에 들이는 이유는 작품에 등장한 다양한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현실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이해 방식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일방적으로 선을 긋기보다는 그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을 책에서 배웠다. 독서를 꾸준히 하면 수용 가능한  인물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등장인물을 다각도에서 살펴보며 깊이 있게 통찰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진다. 현실에서는 존재하기 힘든 서사를 접하며 마음 근육을 기르다 보니, 타인을 대하는 자세가 너그러워지는 장점이 있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서점에 들러 책을 읽고 온다. 집에 오면 의미 없는 시간이 금방 흐르는데, 나는 그 시간이 아깝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지친 몸을 소파에 맡기며 뒹굴거려도 좋을 텐데 휴식에 유난히 인색하다.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퍼지는 시간이 싫어서 주차비를 지불하며 서점에 들른다. 눈에 띄는 책을 여러 권 골라 오늘의 운세를 보듯 마음에 들어온 책을 펼치면 생각과 다르게  새벽부터 줄기차게 바빴던 오늘의  무게가 피곤해서 제대로 집중하기도 힘들다.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커피를 홀짝, 폰을 들었다 놨다 하다 보니  읽어도 모를 때도 많다. 차라리 소파에서 뒹굴거리면 몸의 피로라도 풀릴텐데, 책상에 앉아 뇌의 스위치는 끄고 조명에 눈만 혹사시키는 의미 없는 시간을 자주 반복한다.


꺼버린 스위치를 다시 켜는 일이 귀찮을 때는 소설이 최고다. 흐리멍덩한 상태라도 스토리는 이해할 수 있다.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지 않아도 흐름은 파악된다. 어느 순간에 정신이 돌아오면 놓쳤던 부분이 문득 재미있어진다. 속도감이 빨라지면 짧은 시간에 읽어낸 분량이 두꺼워서 뿌듯하다. 이런 날은 일부러 서점에 들른 나를 칭찬하게 된다.


드라마 보는 것보다 소설을 좋아해서 많은 소설을 읽었고, 다양한 주인공들을 만났다.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에 대한 간접경험이 많다. '알랭드보통'의 작품들을 읽으며 머리로는 사랑이 무엇인지 훤하게 안다. '셰익스피어'와 '밀란 쿤테라'를 거쳐 '아니 에르노'의 사랑 이야기를 섭렵했으니 그 정도 데이터가 쌓이면 사랑꾼이 되어야 맞다. 뮤지컬과 연극을 좋아해서 수백 편의 작품을 보았고, 남녀 주인공들의 감정에 빠져서 흘린 눈물이 대중탕 욕조만큼은 될 터, 이 정도면 감정을 표현하는 스킬도 도사가 되어야 한다. 책의 경험이 삶에 녹아들기 어렵다고 해도 '사랑에 대하여' 바보는 아니어야 한다.



오랜만에 호감 가는 사람이 생겼다. 짧은 시간에 누군가 궁금해지는 경우는 과거의 나에게는 없었던 역사다. 첫사랑이었던 전남편이 유일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혼자가 된 이후로 처음으로 벌어진 마음의 일이었다. 설렌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을 거듭했다. 책에서는 숱하게 벌어지는 흔하디 흔한 일이기에 유사한 데이터를 떠올렸지만, 작가가 창작한 스토리에 나를 맞추기는 어려웠다. 마음의 가닥이 잡히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다. 내 스타일이 어떤지 스스로 탐구해야 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확인하고 결론을 내려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살면서 마음을 먼저 드러내는 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전남편이 첫사랑이었다. 혼자 끙끙대며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가 다가와 주었다. 처음 간절하게 원해본 사랑과 결혼까지 했으니 운이 좋았다. 살아볼 만큼 살아보고 미련 없이 이혼을 했으니 또한 감사한 일이다. 이혼 후에는 독립적인 삶이 좋아서 누군가를 특별히 품지 않았다. 마음을 드러내기는커녕 두드린 사람도 없었다. 내가 좋다고 다가왔는데 나쁘지 않으면 잠시 허락했던 정도. 지독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다.



아주 미약하지만 용기를 내어 그의 주변을 살폈다. 상대의 신호가 그린으로 보였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출발해 보았다. 아주 살짝, 작은 발걸음 떼기. 그리고 지켜보기. 라이트의 컬러를 짐작하기.


소설은 다각적인 시선에서 인물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과거의 아픔과 결핍, 현재 상태에 대한 이해도가 충분하다. 그와 그녀가 왜 오해를 하는지 당사자는 몰라도 독자는 안다. 그래서 주인공보다 독자가 더 안타까운 순간도 많다. 오해하는 주인공 때문에 내 마음이 무너진다.


현실은 아니다. 밀착되기 전까지 그 사람에 대한 데이터가 없다. 정보가 있다고 해도 조각이라서 이해하기에 부족하다. 마음의 방향이 나처럼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 때는 받아들이고 싶은 부분만 받아들이거나 내 감정에 맞춰 편집해 버린다. 객관적이지도 않고 정확하지도 않다. 사람을 알아가는 일은 책처럼 쉽지 않다. 


소설은 작가라도 있어서 물어볼 수 있는데 현실은 물어볼 때가 없다. 혼자 마주해야 한다. 요동치는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나이는 먹었는데 마음은 늙지 않았다. 청춘의 설렘과 갱년기의 호감에 큰 온도차이는 없었다. 겉은 쪼그라드는데 마음은 팽팽한 일이 더 늙으면 추해질 것도 같아 그나마 가장 젊은 오늘,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욕망해 보고 싶었나 보다. 소설의 된장이 현실에서도 된장인지, 아니면 똥인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현실은 소설을 닮았으니까, 소설처럼  똥이 아닌 된장의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었던 내 안의 청춘.


이른 결론은 쓰리다. 아주 조금 발걸음을 떼다가 건너야 할 시간을 놓친 기분이다. 다음 신호를 기다려 볼까, 고민을 하는 사이 벌써 신호가 바뀐 느낌이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건너다가는 내가 다칠 것만 같다. 마음이 늙지 않은 만큼 마음의 결도 바뀌지 않았다. 마음을 드러내는 일에 나는 여전히 겁이 많고 소심하다.


뜨겁게 사랑하는 소설처럼, 자신을 바꾸어내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번쯤 해보고 싶었던 '된장과 똥의 구분법'은 손가락에 힘도 들어가기 전에 스르르 풀려 버렸다. 현실은 현실이고 소설은 소설이었다. 주인공은 주인공이고 나는 나. 안으로 휘몰아치는 감정에 휩쓸려 다니다가 잠재우는 과정부터 진이 빠졌다. 스스로 만든 감정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자서 번아웃 되었다.


컴백홈. 머릿속으로 떠났던 모험은 이미 집으로 돌아왔다. 지도만 보고 내려 두었다. 마주해야 하는 과정이 두려워 제자리에 머물기로 했다.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안으로만 파고드는 마음은 크기도 전에 늙어버릴 모양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찍어 맛을 봐야 쓴맛인지 짠맛인지를 알아가며 여물텐데, 성장은 글렀나 보다. 근육도 찢어지는 아픔이 있어야 근력이 생기는데, 마음이 아픈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겁쟁이는 앞으로도 책에서나 마음을 풀어놓으려나 보다.



마음이 고만큼인 사람에게 그나마 책은 영양제가 되어줄 것이다. 근력 운동을 하면 더욱 좋겠지만, 허약한 관절에 금만 갈 수도 있다. 성장을 하기 전에 늙었으니 도리가 없다. 영양제로 보충을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변명 거리가 차고도 넘쳐서 용기를 잃은 마음에게 책의 문장은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고, 보듬어 줄 것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않고 살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네줄 것이다. 여우의 신포도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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