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잘 모르겠다. 그저 잘 키우겠다는 신념으로 내 몸이 부서질 것 같아도 모유수유를 하고 천 기저귀를 쓰며 키웠다. 점심시간이면 보건실에 가서 유축기로 모유를 짜내었다가 집에 가서 먹였다. 출근길이 멀어서 고되어도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는 욕심에 죽기 직전까지는 참아낸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었을까. 아이는 가족의 사랑을 느낀 적이 없다고 한다. 엄마는 늘 내 편이 아니었고, 쌀쌀맞았다고 했다. 학교 생활을 하며 친구 문제로 힘들 때, 힘이 되어 준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결같이 한다. 내 기억도 그렇다. "같은 문제가 반복될 때는 네가 문제가 있을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누가 내 새끼를 괴롭혀!" 라거나 "많이 힘들겠구나."처럼 편들어주거나 무조건 믿어주는 마음을 전하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 사랑이었지,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따스한 말을 건네는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믿어주고 인정하며 수용해야 하는데, 내가 창조주라도 된 듯 만들고자 했다. 좀 더 완벽하도록. 단점이 보이면 고쳐가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닌 걸 알았지만, 태도까지 고치지는 못했나 보다. 여전히 나는 아이에게 불만을 이야기하고 단점을 주입하는 엄마다.
살아가는 마음이 편해진 건, 아이들에 대한 기대나 불안을 거둔 다음부터였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될 것 같았다. 엄마가 애쓰지 않아도 아이들은 어쨌든 살아갈 테니까. 이래야 한다는 관념으로 기대를 하면 나도 아이들도 계속 힘들 것 같아서 모든 걸을 내려놓았다.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도, 왜 엄마에게 불만인 걸까. 이해하지 못한 시간도 있다. 덜 내려놓았음을 최근에야 알았다. 조금 부여잡고 있을 때의 말투와 표정은 다 내려놓은 후의 말투와 표정과 달랐다.
생활에는 일종의 규범이 필요해서 생활공간의 규칙이나 약속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엄마는 아이의 특성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온전하게 수용하지 못했다. 수천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깨닫는 어리석은 중생처럼, ' 내가 쓸데없는 일을 반복했구나.'가 밀물처럼 자연스럽게 찾아든 순간을 마주한 게 얼마 전의 일이다. 상처받았다면서도 엄마와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마음 여린 녀석의 눈물을 바라보며 그제야 이십 년도 넘은 케케묵은 체증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폭풍우가 치고 폐허가 된 마을에 잔잔한 파도가 평화롭듯이, 아이가 어떤 삶을 살 건 간섭하지 않으며 오롯이 축복해주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러워졌다. 평소와 똑같은 아이에게 '좀 치우지'라는 말보다는 '힘들지, 쉬어라'가 호흡처럼 뱉어졌다. 부모라면 가질 법한 욕망에 기대었던 계획도 거두어졌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만 해주면 되리라. 부모라서 가져야 하는 책임도 가벼워졌다. 이런저런 재테크 계획을 세우고 아이들을 위해 해줄 몫을 챙겨두느라 바빴던 마음도 진정되었다. '앞으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그렇지 못한 마음의 위로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태도가 되어도 괜찮겠다.
애쓰며 사는 엄마가 저들 눈에도 보이는지, 이십 대 중반의 나이가 부담인지 엄마에게 바라기보다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도 보인다. 엄마의 따스함을 느끼지 못하고 컸다는 첫째는 주변을 살피는 성향은 아니지만 삶의 책임감이 강해 보여서 믿음이 간다. 형과 달리 엄마 아빠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는 둘째는 엄마보다 주변을 잘 챙기는 살가움이 있어서 고맙다. 엄마가 아파 보이지도 않으면서 아프다고 우겨도, 밖에 있을 때는 전화를 걸어 엄마 상태를 확인하는 다정함이 있다.
2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와 재회를 하고 안정된 연애를 하는 첫째는 이벤트를 위한 선물을 구경한 적이 없다. 고등학생 시절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생일 카드를 만드는데 하루종일 걸린 기억 정도가 남았을까. 코로나 학번이라 대학은 가보지도 못하고 군대를 다녀온 둘째가 요즘 연애를 하는데, 달달함의 극치다.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선물 받으며 본인도 뭔가를 챙겼다. 자세히 보니 동갑인 여자 친구는 이번에 대학 졸업을 하게 되어 케이크를 주문했나 보다. 냉장고에 고이 모셔둔 맞춤 케이크가 흐뭇해서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여자친구가 챙겨준 초콜릿을 궁금해하니 풀어서 보여준다. 강남의 유명한 가게에서 맞춘 거라는데 찾아보니 무지 비싸다. 이런 정성으로 연애를 하는 거구나. 오십 넘은 엄마는 상대가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대 놓고 물어본 후에 사주지도 않았는데, 이십 대에는 질문 없는 이벤트가 필요할 테지. 덕분에 비싼 초콜릿을 먹어 보았다.
을사년, 첫째는 대학원 다니며 용돈 버느라 바쁠 것이고 둘째는 가성비 떨어지는 기숙사에서 나와 오피스텔에서 처음 시작하는 자취생활을 유지하느라 힘들 것이다. 둘 다 연애도 해야 하니, 사정없이 오른 물가를 감당하는 연애 생활을 위해 해야 할 아르바이트도 늘어나겠다. 엄마도 만만치 않게 바쁘다. 혼자 집을 지킬 초코가 안쓰러워서 엄마도 둘째도 요 며칠 강아지꿈을 꾸곤 했다. 엄마는 초코를 잃어버리고 엉엉 우는 꿈을 꾸었고, 둘째는 초코를 버리는 꿈을 꾸었다. 서로 시간을 맞추어 초코의 산책만큼은 거르지 않았는데, 유지가 될지 모르겠다. 숨고에서 펫시터를 알아두었으니 필요하면 써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떠나가는 시기에 불안보다 기대 없는 수용과 인정을 선택했다.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하다. 기대가 심어 두었던 틀에서 벗어났더니 자녀에서 동등한 성인이자 타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타인의 삶은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일 뿐, 내 영역이 아니고 내 몫도 아니다. 그저 축복하면 된다.
너무나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사랑을 몰랐다. 사랑을 내려놓으니 사랑이 보이는 것 같다. 어리석은 마음은 오늘의 깨달음을 쉽게 잊을지도 모른다. 어리석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아마 마음은 또 애쓸 것이다. 폭풍우가 친 다음 날, 폐허 속에서 발견하는 평화처럼 다시 마음을 놓아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