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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착각이다

by 루서



가을이다. 걷다가 하늘 한 번 올려만 봐도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은 '참 예쁘다'


늦게 찾아온 가을이 예뻐 죽겠다. 지독한 더위와 이른 추위를 넘기고 찾아온 가을이라 기대하지 않았건만, 깜짝 선물처럼 반갑다. 습해서 힘들었던 긴 여름이 지나자마자 추워지길래 자연도 힘들어서 선명한 가을빛은 기대하기 어렵겠구나, 했는데 섣부른 착각이었다. 올 가을도 자연은 어김없이 축복 같은 선물을 보냈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풍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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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가 참 좋다. 어린 시절엔 공부하느라 피곤해서 학교가 벅찼다. 좋아하는 친구와 즉석 떡볶이를 마음껏 먹으며 인생의 그 시절만 가능했던 미묘한 감정을 나누었던 기억이 아련하고 애틋하다. 그 나이가 아니라면 겪지 못했을 만화 같은 순간이 그때는 심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귀엽다. 다 좋지도, 다 나쁘지도 않았던 한 때는 분명 아픔도 슬픔도 있었을 텐데 예쁜 기억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감당해야 할 몫은 내 역량 이상이라서 재미보단 버거움이 컸다.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공부하느라 힘들었던 10대, '결혼'과 '출산'의 임무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주어진 숙제라 여겨 해냈던 20대, 엄마 노릇하느라 나를 지우고 책임 앞에서 전전 긍긍했던 30대, 뭐라도 해보겠다며 바짝 긴장해서 성취하려고 애쓴 40대를 지나고 나니, 이젠 홀랑 '나'만 남았다.



나이가 들면서 책임져야 할 분량이 무거우면 더 힘들 텐데, 다행스럽게도 감당의 범위가 줄었다. 아이들은 다 커서 각자의 몫을 하고 있으니, 엄마가 개입할 구멍이 훨씬 적다. 막바지란 생각이 홀가분하게 만든다. 앞으로 펼쳐질 아이의 미래는 아이의 몫. '나만 잘 살면 된다'라며 아이들보다 스스로를 잘 돌보려고 애쓰는 중이다. 평가는 지나 봐야 알겠고, 그 마저 기억의 몫이겠지만.



기억은 착각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기억은 감정이다. 같은 일을 겪어도 존재에 따라 기억이 다르다. 함께 놀라운 일을 겪었다고 해도, 누군가는 신기하고 흥미로워서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고 누군가는 혼란스럽고 벅차서 난감한 기억으로 남는다. 같은 경험이더라도 다른 감정으로 기억한다.



기억은 변하고 달라진다. 기억은 변덕스럽다. 새롭게 쓰여지기도 한다. 함께 했던 사람이 좋으면 좋은 기억이지만, 언젠가부터 그 사람이 미워지고 싫어지면 함께 한 일도 그렇게 된다. 좋은 사람과의 과거는 현재도 좋지만, 판단이 달라지면 기억도 다르게 써진다. 기억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 어쩌면 미래의 일일지도 모른다.



살아온 기억과 연결되지 않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 작년 가을부터 주말만 되면 빠짐없이 갔던 장소, 김해가 그렇다.



주말마다 김해로 내려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은 특별했다. 대부분 미리 계획을 세워 KTX를 타고 갔지만, 어떨 땐 기차표가 없어서 비행기를 타고 간 날도 있다. 저가 항공 국내선을 이토록 많이 탔던 해가 있었을까.


집에서 서울역으로 가서 구포역에 내려 다시 이동하기 까지 거의 5시간을 금요일, 토요일마다 반복했다. 비행기를 타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수속이 늦어질까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야 했고, 연착되는 경우도 많아 평균 4시간을 이동에 할애했다. 가을 지나 겨울 내내 그랬다. 힘든지도 모른 채 들떠서 왕복했다.



10년 넘게 살아온 우리 집 산책로보다 익숙해져 버린 김해 봉리단 길, 맛집과 카페 벽돌 깨기를 한다며 열심히도 다녔다. 모든 카페와 식당을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김해 갈 때마다 산책을 해서인지 어느 골목에 어느 음식점이 있고, 카페가 있는지는 눈에 훤하다.



그랬던 봉리단길이 이제는 안녕이다. 더 이상 김해 갈 일이 없어졌다. 인생에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김해였는데, 잘 아는 장소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구석구석이 보이는 것 같다. '여기엔 어떤 카페가 있을까?' 호기심으로 걸었던 좁은 골목이 떠오르는 순간이면,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진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를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긴 하지만, 내가 머나먼 남도의 김해를 뻔질나게 가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모든 것이 운 같다가도 운의 지분에 내가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갑자기 김해로 향한 건 내 의지였으니까.



운과 의지가 뒤섞인 인연을 마무리했다. 김해의 인연은 다른 장소에서 새롭게 쓰일 예정이다. 새로운 이야기는 어떻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연극의 제2막이 새롭게 열리는 기분이다. 1부와는 전혀 다른 2부가 기다릴 것 같다. 주인공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를 품은 흥분이 내 안에서 전해진다. 이럴 땐 겸손해야 한다. 그래서 작은 바람을 되새긴다. 상처가 아닌 해피엔딩이길.





김해의 기억을 떠올려보니 좋은 기억들 뿐이다. 어쩌면 힘들었을 김해의 여정은 긍정적인 감정 덕분에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오갔던 긴 시간의 보상은 긍정적인 기억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만 책임지면 되는 인생이라 가뿐하다고 말하면서도 인생, 잘 모르겠다. 오직 존재에 집중해서 현재를 살고, 미래를 계획하기엔, 똑똑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아서 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이는 것은 구멍과 틈뿐이다. 이렇게나 허술한 사람인지, 요즘 들어 알게 되어서 말이다.



그래도 미래를 떠 올리면 좋은 것만 생각하고 싶다. 기억은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도 통하는 것처럼. 미래가 곧 기억인 듯 좋은 것들로만 채우고 싶다.



과거에 의지한 기억이 현재를 거쳐 미래에 피어날 예정이다. 새로운 장소에서 겪게 될 일들이 수필이 될지, 소설이 될지 시가 될지는 모르겠다. 장르는 알 수 없더라도 창작자가 '나'이기에 주제는 내가 쓰고 싶다. 그렇게 되리라 믿는다. 처음 쓰일 문장이 지나고 보면 착각이거나 왜곡이더라도 일단, 즐거웠으면 좋겠다. 출발이 될 기억의 뿌리가 행복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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