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행복한 순간만을 추억하려 하지만, 정작 가장 오래 남는 기억은 예상치 못한 실망이나 고단함 속에서 찾아온다.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고소공포증에 덜덜 떨며 하늘을 날았던 순간도, 런던에서 한겨울 공항 바닥에 몸을 뉘었던 밤도 그랬다. 당시에는 두려움과 불편함으로 가득했던 경험이 오히려 기쁨과 특별함으로 변모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각각의 여행에서 많은 시간이 흐른 올해 7월, 나는 무작정 홀로 강릉 여행을 떠났다. 날씨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떠났더니 이게 왠 걸, 사흘 내내 비가 흩뿌렸다.
비가 오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귀찮아져 시내에 있는 숙소에만 머물까 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거, 자전거를 끌고 바다로 달렸다.
그렇게 40분 정도 빗방울과 씨름하며 달려 도착한 강문해변. 비구름에 가려져 수평선조차 보이지 않는 사나운 해변을 보자마자 “아, 괜히 왔다”하며 후회가 솟구쳤다.
그런데 정확히 3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등 뒤가 따뜻해지고 눈앞이 환해졌다. 어리둥절한 채 고개를 들어보니 그 짙은 먹구름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던 것이다. 그러곤 정말 믿기지 않게도 바다 저편에 무지개가 피어나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 속에서 나는 무지개를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망설임 없이 모래사장을 뛰어갔다. 빗방울에 흠뻑 젖은 머리와 넘어갈 듯한 숨이 그 순간만큼은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흐린 하늘과 거센 파도에 대한 불평으로 시작된 하루가, 무지개 하나로 가장 잊지 못할 기억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서 다행이라고. 오늘 이 경험 덕분에 나는 언젠가 또 폭우가 내리는 거친 날에도 굴하지 않고 달려 나갈 수 있으리라고. 무지개를 향한 희망을 품고 이제는 그 어떤 폭우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다고.
나의 이런 경험을 비슷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영화가 있다. 무인도에 조난당한 채 삶을 지속해 나가는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
이 작품에서 명대사를 하나 꼽으라면 모두가 떠올릴만한 문장이 있다.
나는 계속해서 숨을 쉴 거야.
내일도 해가 뜰 것이니까.
내일의 조류가 무엇을 가져다줄지,
그 누가 알겠어?
이 대사를 보며 우리가 여행에서 만나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기쁨도, 슬픔도, 결국은 삶이 던져준 조류 같은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빛나는 풍경만을 원한다고 해서 늘 해가 쨍쨍 비출 수는 없다. 비도, 폭풍도, 안개도, 모두 우리가 선택하거나 피할 수 없는 환경들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품고 하늘을 날아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맞은 새벽이 더 따뜻했으며, 폭우 속을 달려 나갔기에 무지개의 환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의 조류에 실망하거나 단념하지 말자. 숨을 고르고, 다시 숨을 쉬며, 내일의 조류를 맞이하러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