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에 대한 강요

by 말랑괴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 나는 급하게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오랜 장마로 진흙탕이 되어버린 땅을 헤집으며 뛰느라 흰 운동화에 흙이 잔뜩 튀어버렸다. 다른 좋은 길이 없을까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웬걸, 여태 지나온 흙탕길 옆으로는 전부 햇살이 쨍하게 비추는 마르고 평평한 땅이었다. 사람들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마른 땅 위를 평온하게 걷고 있었다. 나는 그 마른 땅을 향해 가려고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그런데 내 앞길은 온통 질척거리는 진흙탕 뿐이었고, 아무리 피하려 해봐도 마른 땅에는 도저히 닿을 수 없었다. 마른 땅 위의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콰쾅-!

천둥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나는 눈을 껌벅이며 정신을 차렸다. 창밖에는 비가 거칠게 내리고 있었고, 1시간 뒤 전공 조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서둘러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열심히 걸으며 꿈 해몽을 검색해보았다.


#진흙 위를 걷고 있는 꿈은 현재 당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힘들게 느껴지며 불안감이 마음속까지 자리 잡고 있음을 나타내는 꿈입니다.

#진흙으로 더러워지는 꿈은 당신의 주변에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심지어 스트레스까지 주는 것을 뜻하는 꿈입니다.


찜찜한 꿈 해몽을 읽으며 마음이 불안해졌다. 최근 전공 수업 조모임 때문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모두가 너무나도 열심히 하려는 분위기여서, 그저 적당히만 하고 싶던 내 입장에서는 조모임에 갈 때마다 숨이 막혔다.

'맞다. 오늘 준비해오기로 한 데이터 수집 다 끝냈었나?!'

혹시 내가 조모임 과제를 안 했나 하는 생각에 잠시 심장이 철렁했지만, 어제 꾸역꾸역 내 할당량을 끝내고 잠든 것이 기억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조모임 약속 시간까지 2분을 남기고 스터디룸에 도착했다. 늦은 것도 아닌데, 이미 조원들이 전부 먼저 도착해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보니 왠지 눈치가 보였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노트북을 꺼내던 나는 조장의 물음에 숨이 턱 막혔다.

"혜수 씨, 데이터 수집 몇 개 해오셨어요?"

"200개 해오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네 뭐 그렇긴 한데.. 어차피 데이터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저희는 조금씩 더 해왔거든요. 저는 300개, 민지 씨는 250개, 승현 씨는 350개, 동규 씨는 몇 개였죠? 400개?"

"네 저 400개 하느라 어제 1시간 자고 왔어요."

자랑스럽게 웃으며 400개 데이터 파일을 꺼내드는 동규의 옆자리에서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 다들 많이 해오셨구나.. 저는 모르고.. 200개만 딱 해왔어요."

"아....."

다소 실망한 조원들의 표정과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네. 그럼 그거라도 올려주세요 일단."


조모임 시작과 동시에 죄인의 기분을 강요당한 나는 4시간이 넘는 조모임 내내 은근히 눈치를 주는 조원들을 견뎌내느라 숨이 막혔다. 오늘도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초과된 시간 동안 조모임을 하고 나서 '이제 마무리합시다'라는 조장의 허락과 함께 조모임이 끝났다. 나는 도망치듯 스터디룸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밖은 여전히 무서운 천둥소리와 함께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다리에 빗물이 다 튈 정도로 그저 앞만 보며 빠르게 걸었다. 진흙탕 꿈 해몽이 다시 떠올랐다. '현재 하는 일들이 힘들게 느껴지며 불안감이 마음속까지 자리 잡고 있음,' '주변에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당신에게 스트레스까지 줍니다.'

지옥의 조모임. 그 누구도 나에게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실망스러운 표정, 그들의 '열심'을 뽐내는 몸짓만 강력히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기분으로 그 모든 것들을 견뎌야 했던 나는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끓어오르는 설움을 숨죽여 소리치는 것뿐이었다.


조모임은 모두가 최대의 열정을 쏟아 열심히 해야만 하는가? 각자 그 수업에서 기대하는 만큼, 얻고 싶은 만큼만 하고 싶어하는 게 비난받을 일인가?


나는 어느새 심장을 쿵쾅대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삼켜버리며 생각했다. 이건 그저 전공 공부에 홀로 정을 못 붙인 내 잘못이며, 지긋지긋한 장마처럼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고. 그저 나에게 맞는 때를 기다리며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진흙탕길에서 벗어나 나만의 마른 땅을 찾아 빛을 볼 것이라고... 그리고 언젠간, 나처럼 힘들게 겉돌던 사람들이 크게 성공하여 세상의 주축을 이루게 될 때쯤엔, 이 세상은 '하기 싫은 건 열심히 안 하면서 당당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열심에 대한 강요를 거부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있을 거라고,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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