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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쥴리 Mar 17. 2024

개똥보다 쓸모없는 나르시스트의 사과

그에게도 한결같은 부분이 있긴 했다. 바로 자기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거나 증거가 있어서 바로 납득이 되는 이유가 아니면 절대로 사과를 하지 않는 부분이다. 반대로 나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천냥 빚도 갚아줄 사람이라, 싸울 때마다 그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목을 매고 씨름을 하느라 진을 뺐다. 물론 그렇게 엎드려 받은 사과가 이미 메말라버린 마음에 찰 리는 없었만 말이다.


지금에야 이것도 나르시스트의 특징 중 하나라는 걸 알게 되니 조금은 납득이 되지만, 전에는 그의 특이한 사과 방식에 자주 상처를 받았다. "미안해" 이 말 한마디가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가 너무 대역죄인이 되는 것 같다나 뭐라나. 그가 마지못해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의 표현은 "미안하게 생각해"였다. 미안하면 미안한 거지, 생각하는 건 뭐 어쩌라는 걸까. 그가 동태눈깔을 하고 저런 되지도 않는 사과를 할 때마다 마음이 닥 끝까지 내동댕이 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또 반대로 내가 뭔가 자기에게 자존심에 금 갈만한 말 한마디라도 하게 되는 때면, 나에게서 정말 영혼을 탈탈 털어서라도 사과를 받아야 하던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사람이 맞았다.



고소장을 쓸 생각으로 법률 자문을 구하려 다녔다. 연말은 프리랜서에게 가장 바쁠 때인데 빌어먹을 전남편과 관련된 일 때문에 내가 괜한 피해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났다. 애초에 나는 고소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자기 여자친구를 건드리지 말라느니, 네가 잘못해서 우리 결혼이 깨진 거라느니, 명의 간수 못한 네 잘못인데 왜 남 탓을 하냐느니, 어른 좀 되라느니 별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해대니 내 인내심이 갑자기 스위치가 내려가듯이 펑 터졌다. 그리고 나는 그를 역으로 협박하기 시작했다.

" 명의 도용과 사실혼에서도 성립되는 상간 소송을 진행할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네가 나에게 함부로 굴 때마다 나는 너를 찌를 칼을 가지고 있다. 네가 뭐라도 되는 듯 굴지 마라. 갑은 나니까" 그리고 그의 여자에게도 상간 소송을 염두에 두라고 통보했다.


그때부터 그는 내 연락을 모조리 피했다. 내가 소송 얘기를 꺼내니 무서워서 나와 대화할 수 없다고 문자가 최소한의 연락 방법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겁주고 망가트리고 싶었다. 내 명의 사건으로 나는 그의 회사에 그가 그동안 내게 했던 행동들을 알렸고, 그는 회사에서 안 그래도 사람들과 관계에 트러블이 생겨서 간당간당하던 차에 더 위태로워진 상태였다. 곧 불혹이고 통장에 500만 원도 없지만 자랑할 만한 건 20대 여자 친구밖에 없는 그는 내가 고소를 하면 자기 인생이 나락 갈 걸 잘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연애하던 때와 별 다르지 않은 다정한 목소리를 하고 전화를 걸어왔다. 나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고, 조목조목 내가 사과받고 싶어 했던 것들을 읊어가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논술 학원에라도 다녀온 건지 일목 정연한 그의 사과문은 완벽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내가 그에게 "왜 그 여자와 그렇게 시작을 한 거냐. 나에게 최소한 예의는 없었던 거냐"라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에 모든 사과문은 잊혔다. "내 인생에 내가 사랑받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


그는 그렇게 나를 또 한 번 죽였다.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구나. 그런데 그건 그냥 궤변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이야기한 것들 중에 진심이라고 느껴진 건 오직 " 마지막 기회 " 그 단어 하나였다. 아, 여자에게 사랑받을 마지막 기회 때문에 나를 그렇게 버렸구나. 나도 그를 참 사랑했는데, 내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나 보다.


어차피 폭력성이 보이는 그와 살아갈 용기도, 빚만 가득한, 보이지 않는 미래를 그리며 살 싹싹함도  어떠한 기대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그를 사랑하긴 했다. 그가 내게 존중을 보여준다면 나는 언제든지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다행인 건지 우리의 별거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고, 지난 7년의 관계는 뭣도 아닌 사이가 되었다. 결혼사진을 지우니 정말 꿈을 꾼 기분만 남았다. 알고 있었다. 나에게도 그와 끝내는 게 더 맞는 길이라는 것을. 그래도 이렇게는 아니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 며칠 만에 다시 죽고 싶던 그날로 회귀해 버렸다. 그렇게 살아내려고 아등바등했던 반년이었는데 이렇게 단숨에 또 무너지는구나. 위궤양에 우울증이 더 심각해져서, 더 이상 그와 연락을 이어가면 내가 그를 죽이거나 내가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소송 건도 상담만 한 채 진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도 그에게 잠수를 탔다. 변호사에게는 일단 생각해 보겠다 정도만 이야기를 해뒀다. 물론 이런 디테일한 부분은 전남편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했는지, 며칠을 미안하다며 연락을 해오다가 어느 순간 나가떨어졌다. 얼마 뒤 그의 카톡 프로필은 또 커플아이템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은 안 바뀐다. 그의 미안하다는 말은 지나가는 개똥만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 더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를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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