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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쥴리 Mar 24. 2024

 전남편이 유서에 내 이름을 쓴다고 했다.

 고소를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수록 내 자신이 피폐해졌다. 그동안의 시간들과 의리나 신뢰 같은 것들을 단숨에 내동댕이친 그를 망가뜨리고 싶어서, 내가 너무 억울하니 그도 맛 좀 보라고 하고 싶어서, 고소할 이유야 생각하면 100가지는 거뜬히 넘었다. 그런데 정작 ''를 위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여자와 데이트할 돈이 없어서 대출을 받을 만큼 거지 같은 남자에게 돈을 뜯어봤자 기분이 러울 것 같았고, 이렇게 바닥까지 내려온 그 남자를 가지고 싶어서 나에게 유책배우자 타령을 하던 그 남자의 27살짜리 여자친구를 고소해 봤자 사실상 얻는  없었다. 애초에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에 상간 소송은 상당히 많은 증거를 필요로 했고, 나는 그에 준하는 증거를 모았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고소를 하는 이유 중에 나를 위한 이유가 하나도 없 것 같아서 힘이 빠졌기 때문이었다.



한 달 동안 고민한 끝에 나는 그냥 그를 버리기로 했다. 나를 들들 볶아대던 전 남편의 여자에게 그냥 네가 그 사람 가지라고 했다. 어차피 그가 돌아온다 해도 돌려받을 생각 추호도 없었지만, 나는 내가 버림받았다는 생각했었지 이제라도 내가 그를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것도 하지 않고 그를 버리기로 했다. 내게도 그와 관련된 건 어떤 것이든 다 무의미해져 버렸으니까.


그 뒤로 얼마가 안돼서 그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그는 내게 쌍욕과 함께 폭언을 했다. 나의 고소하겠다는 말 때문에 자기는 계속 잠을 못 자서 궁지에 몰린 기분으로 산다고, 그냥 고소하라고 감옥에 가겠다고 했다. 그가 법을 공부해 봤다는 것도 이제 보니 개뻥이였다. 민사사건으로 감옥을 왜 가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망나니처럼 내게 고래고래 화를 냈다. 자기 인생이 나 때문에 망가졌고, 그의 가족은 그런 망가진 그를 안 보려고 하고, 건강도 나 때문에 망가져서 회사도 잘 못 가서 잘릴 수도 있다고 명의 빌려준 건 너인데 왜 자기한테 그러냐며 정신 나간 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고립되었고 죽고 싶다고 죽게 되면 유서에 내 이름을 쓸 거라고 협박도 했다. 대체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이쯤 되니 미친 사람이 원맨쇼 하는 걸 오디오북으로 듣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작 며칠 전에도 본가 근처에 있는 그 교회 주변을 지나가다 그 둘의 뒷모습을 우연히 보고는 심장이 덜컹하고도 가만히 있었는데 , 그는 이유도 없이 다짜고짜 자기 인생이 망가졌다고 화를 내는 게 황당했다.


나는 눈물이 고였지만 담담하게 되받아쳤다.

" 나한테 지랄이야. 니 인생 망가진  너 자신 탓이야. 너는 마흔이 다돼서도 여전히 구제불능 남 탓이구나. 네가 망가진 게 왜 내 탓이니. 나는 네가 망가뜨리려고 작정했어도 안 망가졌어. 왜? 고작 너 때문에 망가지긴 내가 너무 아까워서. 너는 나르시스트야. 정신과 가서 약 타먹고 진료받아. 너 같은 걸  사랑하고 전남편이라고 애쓴 내가 멍청하다. 나 너 고소하기 싫어. 네 여자친구한테도 너 그냥 가지라고 했어. 나 그냥 너랑 관련된 거 싹 다 버리고 살고 싶어. 그리고 죽고 싶으면 죽어. 내 이름 쓰고 죽어도 나는 상관없어. 대신 곱게 죽어라 남 피해 주지 말고."


전 남편은 내 얘기를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갑자기 나보고 네가 자기 인생을 왜 걱정해 주냐고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미친놈이다. 더 이상 대꾸해 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그에게 진심이란 게 있긴 했을까. 원래 그런 인간인 건지 아니면 망가진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는데, 나에게 죽을 때 내 이름을 유서에 남기고 죽겠다고 악을 쓰는 그의 본심 따윈 이제 알아봤자 내 인생에 득이 될 게 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차단했다. 아마 다른 번호로 또 전화가 걸려올지도 모르겠다. 그와 별거를 시작하고, 그로 인해 어이없게 우리가 끝난 그날부터  나는 고장 난 뻐꾸기시계처럼 울어재끼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젠 눈물이 흘러도 뺨에 감각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강해진 건지 무뎌진 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죽던 살던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여행 가서 나를 방치하고 친하지도 않은 지인에게 인사를 간다며 예의 차린다고 나에게 예의 운운하던 그는, 정작 자기랑 5년을 사귀고 결혼을 했던 여자에게는 예의가 없다. 나는 지인보다도 못한 존재다. 그걸 알아차리는 데에 참 오래도 걸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딱 일 년이 걸렸다. 작년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 될 뻔한 날 이 사람과 별거를 했고, 얼마 안 가 그의 배신으로 난리통을 겪고, 명의도용으로 정신없던 연말을 겪고, 이제 또다시 내가 그와 치렀던 결혼식의 날짜가 돌아온다. 법률혼 정리와 별 다를 바 없이 엉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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