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에 갔던 삿포로는 이별 여행지가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다. 줄거리도 여운이 남고 먹먹했지만 오타루의 설경이 어릴 때부터 너무 잊히지 않아서 버킷리스트에 꼭 홋카이도 여행을 적어 놓고는 했다.
전 남편은 누구보다 나의 필요를 항상 잘 알아차려 주는 사람이었다. 결혼을 하고 내가 지쳐간다는 걸 느낀 건지 내가 항상 노래를 불렀던 홋카이도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했다. 물론 여행 경비는 내가 더 냈어야 했지만, 그 맘이 고마워서 들뜬 마음으로 예약을 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 가 그와 다투고, 그가 내게 돌이킬 수 없는 폭언과 폭력을 보였을 때 나는 여행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그는 나를 회유했다. 헤어지든, 잘 되든 일단 가보자고. 네가 엄청 가고 싶어 했는데 이때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고 말이다. 정말 그렇게 설레지 않는 여행 준비는 처음이었다. 그와 함께 결혼하고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인데도 왠지 이별 여행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와 함께 도착한 삿포로는 눈이 셔벗처럼 곱게 내리고, 바닥은 미끄럽고,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귀여운 뻐꾸기 소리가 나는 예쁜 도시였다. 그와 손을 꼭 잡고 사진을 찍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일루미네이션도 감상했다. 하지만 마음은 고장 나 있었다. 여행을 떠났으니 그와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내 기대와는 달리 그는 이 여행을 잘 완수해야 하는 프로젝트 팀원 같이 여행에만 집중했다.
일일 가이드 투어를 신청해서 한국분 몇 분과 함께 비에이- 후라노 투어를 갔다. 가보고 싶었던 흰 수염 폭포와 크리스마스트리는 정말 절경이었다. 그와 말없이 수행하듯 여행을 하는 기분에서 조금 벗어나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진을 찍고 재밌는 하루를 보냈다. 마지막에 함께 노천탕에서 온천을 하고 함께 초밥을 먹으러 가기 전까지. 그는 이동하는 내내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손을 잡지도 않았다. 그가 정말 여기에 와서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함께 간 초밥집에서 그는 내게 다짜고짜 짜증을 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그를 남편으로서 존중하지 않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해서 기분이 나빴다고 말이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서로가 마음을 먹고 겨우 간 여행인데 그는 자꾸 나에게 짜증을 냈다. 나는 그걸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그냥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원한 건 대화였지만 그는 자꾸 나에게 리액션을 요구했다.
지쳤고 그럴 에너지가 없어서 그냥 내가 졌다고 항복하고 넘어갔다. 그다음 날은 내가 가고 싶던 작은 도시 '오타루'에 갔다. 그리고 내 보너스를 탈탈 털어서 예약한 고급 료칸에 하루를 묵었다. 개인 노천탕이 딸려있고, 비수기라 대온 천 노천탕에도 사람이 없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겸 하루에도 몇 번씩 목욕을 했다. 혼자 눈 쌓인 정원과 나무들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즐기는 노천탕은 분명 천국인데 내 마음이 지옥 같으니 너무 슬펐다. 이런 여행을 오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는 내가 이 여행에 동행했다는 것 자체로 그와 당연히 회복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그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가 내게 폭력적으로 굴지 않겠다는 약속도,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허심탄회하게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여행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내가 끼어들 틈 같은 건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게 보기 좋다며 여름에도 또 삿포로에 가자고 했다. 우리 엄마도 좋아하실 것 같다고 꼭 모시고 오자고도 했다. 사실 그 말이 기쁘지 않았다. 내가 과연 그와 또다시 여기에 올 수 있을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엄마를 모시고 온다는 말에, 빚 갚기도 어려운 형편에 무슨 돈으로 여기를 온 다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들키면 난리법석이 날 테니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와 갔던 여행 중에 단연코 최고의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삿포로가, 홋카이도 자체가 좋아서였다. 그와 손을 잡고,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고, 웃으면서 나눴던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여전히 소중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너무 아픈 추억이 되었다. 언젠가 나 혼자서라도 다시 가봐야지 라는 생각은 하지만 남의 삿포로 사진이나 브이로그 같은 건 볼 엄두조차 안나는 지경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고 싶던 곳이 너무 슬픈 추억이 되어 버렸다.
폭력적이고, 나를 힘들게 하고, 나와 맞지 않았고, 결국 여자가 생겨 떠나버린 전남편은 내게 추억만 남기고 그렇게 떠나버렸다. 그 사람은 명의 도용건으로 나와 연락을 하며 삿포로가 떠올라서 요즘 브이로그를 자주 본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이가 없다. 나는 사진도 못 꺼내보는데 너는 브이로그까지 꺼내서 보는구나. 아마 그는 새 여자와 함께 또 빚을 내서 삿포로를 다녀왔을지도 모르겠다. 신혼여행지에 함께 가려던 사람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 사람만 도려내고 나의 소중한 추억들은 온전히 간직한 채로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데 불가능한 걸까.
아직 나는 삿포로에 가지 못할 것 같다. 그와 함께 간 건 후회 하지 않지만, 그래도 괴로운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언젠가는 또다시 갈 수 있게 되기를, 나 혼자이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누군가와 함께 던 새로운 추억으로 덮어쓰기를 할 수 있는 날들이 꼭 오기를 조용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