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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쥴리 Mar 31. 2024

이별은 더 많이 서운한 사람이 지는 싸움 같다.

" 나는 끝나면 뒤끝 없어" 전 남편인 그가 내게 자주 했던 말이다.

 나는 묻곤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끝이 일방적일 수도 있잖아"

그가 말했다.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지. 나는 내가 끝이면 끝이야."


사람들에게 늘 인기가 많아 보였던 그는 어느 자리에 가도 신기하게 한 명씩 적을 만들고 왔다. 이유는 늘 같았다. 말을 너무 막 해서 혹은 너무 사람을 배려하지 않아서. 모임에 어떤 사람이 조금 체중이 늘어난 상태로 오랜만에 참석을 하면 그 사람은 꼭 "너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살이 쪘냐?"라고 타박하듯 무안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때의 어린 나는 뒷 말을 하는 것보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사람이 더 쿨 해 보이는 쿨병에 걸려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뭔가 배배 꼬인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 칼 같은 말이 나에게로 향한 적이 없었으니 그런 철부지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의 말에 상처를 받고 누군가가 떨어져 나가면 그는 뭐 별것도 아닌 거에 그러냐며 자기는 끝난 관계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관계이든, 일이든 무력한 인간의 삶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다만 끝이 다가왔을 때 나는 그걸 잘 갈무리 짓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라고 생각해 왔다. 나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그런 특이한 방식의 맺고 끊음을 하는 그의 '끝"은 우리의 관계에,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그와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나와의 관계도 그렇게 일방적으로 끝 냈다.


그는 여전히 sns 프로필에 "영원에 대해 생각해"라는 문구를 남겨놓는다. 뒤끝이 없다면서, 남의 끝은 철저히 망가뜨려 놓고 일방적으로 또 다른 사람과 영원함을 생각한다. 모순덩어리 그 자체다.




최근에 구 여자친구, 구 남자친구, 현 여자친구의 관계가 얽힌 연예계 기사를 들여다보며 생각해 보았다. 정말 헤어짐이라는 건 양쪽이 합의하지 않아도 한 사람이 단절하면 끝이 되는 건가. 기다리는 사람은 말귀를 못 알아듣고 그 자리에 남아있는 건가. 나도 그랬던 건가? 괜한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 조금 착잡했다. 연예인에 딱히 관심이 없는데도 그 기사에 달린 사람들의 댓글과 반응이 나의 신경을 할퀴었다.



나는 어차피 각박한 인생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다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싶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는데 그걸 실천하며 사는 게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전 남편과얽히고설킨 게 너무 많아서 옷깃 정도가 아니라 마치 한 옷을 같이 입고 있는 관계 같았다.

그래서 그 옷이 나에게 맞지 않고 나를 옥죄어 와도 벗기가 힘들었다. 내가 발버둥을 치고 벗어나지 못한 그 관계를 그가 끝내는 방법은 충격적이게 단순했다. 그냥 옷을 찢고 자기만 나가 버리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 간단하고 파격적인 단절에 말을 잃었고,  나는 그걸 못 하는 사람이라는 게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을 뿐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헤어짐을 겪었기에 나는 아직 멍하게 남아 상처받은 지난날을 이렇게라도 혼자서 갈무리를 해본다. 여전히 그 사람과 사람들 앞에서 평생을 맹세한 결혼식을 치르고 이렇게 된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의 맹목적이고 잔인한 끝맺음 덕에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너무 아프다. 내가 믿었던 인연에게 나는 언제든지 맘에 들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단절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나는 그렇게 관계를 쉽사리 맺어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라도 알게 됐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와 헤어진 이후, 그와 함께 자주 가던 카페나 식당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마음이 아파 번 다시 못 갈 것 같았지만 즐겨찾기에서 차마 지우지 못했었는데, 다시 보니 폐업을 했다거나, 지나가다가 조금 신경이 쓰여 문득 돌아보면 상호명이 바뀌어있거나 하는 그런 신기한 일들을 겪곤 한다. 그게 못내 서운해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그래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시그널을 보내주는 것 같았다.

마치 나에게 새로운 시작을 하라는 것처럼. 지나간 것은 그냥 거기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처럼.

새로운 식당은 얼마든지 있고, 좋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이다.



못내 버리지 못한 서운함의 이유는 내가 그에게 했던 노력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이별도 덩그러니 나 혼자 감당해야 했으며, 관계 하나도 제대로 끝을 못 내는 바보가 된 것 같아서였다. 자주 가던 카페가 얼마 뒤 문을 닫아도 서운해서 눈물이 나는 사람에게, 소통 없는 이별이란 참 잔인하다. 그는 나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또다시 누군가에게 영원함을 고백하고 믿는다. 너무도 부러운 마인드다. 마치 그와 가정을 꾸리고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상대가 내가 아니어도 됐다는 듯이, 또 다른 영원한 관계를 꿈꾸면 그만이라는 그 사람을 죽이고 싶다가도 부럽기도 하다.


여전히 나는 어떤 관계도 일방적이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맺은 인연이 여기까지면 서로 잘 지내라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하면서 손을 흔들고 싶다. 내가 쓸데없이 낭만적인 걸까? 사실 개판이 되어 버린 지금 나는 그에게 고소하겠다는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어서 고맙다고는 못할 것 같긴 하만 말이다.



 나는 이제야 나만의 헤어지는 방법을 조금씩 깨닫고 찾아간다. 나는 영원한 관계를 믿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내 앞에 닥친 것들을 마주하고 지금 소중한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다가 그 관계가 사그라들게 되면 정제된 언어와 덤덤한 예의를 갖추고 놓아줘야지라고 생각하는 것만이 내 지금의 최선임을 아는 것이다. 앞으로 나의 삶에서는, 부디 나와 같은 마음인 사람들과 옷깃을 스치게 되는 일이 많아지기를 조금이나마 기대해 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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