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셋의 봄, 1년도 안되어 사실혼 정리를 결심하다.
1. 서른셋의 봄, 1년 만에 사실혼(이혼) 정리를 결심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유독 타임슬립에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좋아했다.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실수로 잃거나, 실패하거나, 후회하면서 시간을 붙잡아 되돌리려는 주인공들을 보다 보면 마음이 절절했고 안타까웠다.
때로는 저렇게 후회할 거면 왜? 하고 답답하기도 했지만. 무튼 나는 영화, 드라마, 소설 속의 그들처럼 절대로 후회할 일은 없게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10대부터 당돌하게도 항상 하고 싶은 말은 꼭 했고( 물론 그게 때로는 화도 불러왔지만...) 20대에는 나에게 헤어지자고 하지만 내가 헤어지고 싶지 않은 남자친구를 처절하게 붙잡기도 했다. 물론 학생 때는 공부를, 성인이 돼서는 내게 주어진 일과 관계에 최대치의 노력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인생은 뽑기 운 같은 부분도 있구나라는 걸 지나 보니 배우게 됐다. 돌이켜 봤을 때 후회 할 일이 한 톨도 없기를 바라면서 치열하게 노력했지만 무력하게도 삶은 늘 내 노력에 대비되는 보상을 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 사고처럼 일어난 엄마 아빠의 이혼을 막을 수 없었고, 자식들을 혼자 키우기 먹먹해서 선택한다던 엄마의 재혼도, 그리고 가부장 그 자체이던 새아빠와의 불화에서 시작된 엄마의 두 번째 이혼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는 조금씩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살았다.
그렇게 무언가를 한 줌씩 포기하고 놓아가며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내가 더 노력했으면, 내가 더 잘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해하는 어린 내가 주저앉아 있었다.
어차피 아무리 가족이라도 남의 인생을 내가 책임져 주거나 노력해 줄 수 없으니 어린 시절은 잊고 내 인생이나 잘 살아내자라고 결심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도 느껴지는 내 본질적인 외로움과 괴로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물론 일도 열심히 연애도 했지만 나의 빈틈을 채워주는 일이나 사람을 찾기는 힘들었다.
또, 유학생활을 오래 하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던 나에게 정작 나의 깊은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봐주거나 나의 필요를 채워 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보통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어딘가에서 유학을 오래 했다고 하면 듣는 말이 으레 정해져 있다.
"우와 대단하시네요. 그럼 그 나라 말도 엄청 잘하시겠어요. 한번 들려주심 안 돼요?".
그 말이 정말 듣기 싫어서, 잘난 체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어딜 가든 나의 소개를 하는 것을 꺼렸다. 물론 나는 프리랜서이니 그것을 어필해야 하는 때도 많지만, 비즈니스 의외에 사적인 대화에서 스몰토크로 유학 얘기를 해봤자 상대에게나 재미있지 나에게는 뻔하고 지루한 루틴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국에 돌아온 뒤 계속 다니던 교회의 청년부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정말 안물안궁이었을 수 있겠지만 그가 묻기도 전에 나는 먼저 시큰둥하게
"아 저는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유학했어요. 그래서 독립적인 편이에요"라고 아무 생각 없이 얘기했다.
근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예상한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혼자서 고생 많았겠어요!"
아 이 사람 뭐지?
순간 나는 그가 내 운명이라고 느꼈다.
물론 그 사람은 별생각 없이 얘기했겠지만 나는 그가 나의 결핍이나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같았다. 사람을 세심하게 들여다볼 줄 알고 다정한 그가 좋았다.
그렇게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와 다이내믹하지만 예쁜 연애를 했다.
그는 나의 기대 이상으로 나에게 헌신적이었고, 내 결핍을 채워주려고 노력했고, 외로운 시간마다 늘 함께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가 가난하고, 직장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꽤 좋은 연봉이었음에도) 친구에게 몇 천만 원을 빌려주고, 그 덕에 생긴 빚 때문에 모아둔 돈이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정말 사기 연애 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그 처럼 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 같았고, 열심히 사는 그가 짠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항상 나의 편이 돼주었던 그를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결혼을 결심했다. 그가 돈이 없으면 내가 쓰면 된다고, 엄마가 반대를 해도 내가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빚이야 갚으면 되고, 그가 매번 거짓말을 하는 건 결혼을 하면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그도 나도 잘 풀릴 거라고 그와 나의 결핍도 서로 채워 줄 수 있을 거라고 마치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웨딩 해피엔딩을 꿈꿨다.
결혼식은 너무 예쁘고 행복했다. 오랜 사귄 만큼 많은 축하를 받았고 비록 엄마의 표정이 밝지는 않았지만 잘 살아내리라 다짐했다.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내가 맡은 대소사는 재정 관리였다. 애초부터 그의 재정 관리를 신뢰하지 못했던 나는 운 좋게 당첨돼서 살고 있는 그의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그의 월급과 나의 월급을 열심히 모아(내 월급을 더 끌어모아서라도) 2년 뒤에 전세라도 좀 더 중심가로 이사를 갈 계획이었다. 물론 그건 나의 일방적인 계획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만큼 자신이 있었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 시큰둥하게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어쩌면 결혼 준비를 하며 몇 번이고 그만 둘 기회는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흐린 눈으로 회피했다.
늘 생기는 그의 돈 문제와 거짓말이 드러날 때마다, 하필 그땐 내가 돈을 더 잘 버는 때여서 내가 더 내면 된다고 생각했고, 내가 힘들 때 맹목적으로 나를 지지해 주고 도와줬던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으니 거짓말도 그럴 수 있다고 넘겼다. 이유야 많지만 결국 나는 멍청했다.
그렇게 흐린 눈으로 행복하기만 한 결혼식을 치른 후 나와 그는 서로 일이 바빠 이사도 신혼여행도 미루고 본가에서 지내고 있었다. 한참 코로나로 난리일 시기였고, 신혼여행 일주일 전인데 감기 기운이 있어서 코로나 검사를 하러 이비인후과에 갔다. 대기를 하고 소파에 앉았는데 마침 핸드폰이 띠링 울렸다. 순간 뭔가 불길했다. "*** 님이 700,000원을 입금했습니다".
응? 70만 원? 남편이 갑자기 왜 70만 원을 보내지 했는데 남편에게서 온 연락을 보곤 심장이 덜컥했다.
"내 전재산 입금했어!"
순간적으로 병원에서 대기하며 마시고 있던 물을 뿜었다. 다행히 내 옷만 젖었다.
그에게 진료 전에 짧게나마 이 당혹스러움을 알려야 했다. "뭐라고? 이게 왜 전재산이야?"라고 물었다.
남편은 애초에 모은 돈도 없던 데다가 결혼하는 데에 다 썼다고 너도 알지 않았어?라는 개똥 같은 말을 던졌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는데 하필 그 이야기를 나눈 곳도 이비인후과라는 게 블랙 코미디 같았다.
연애 때부터 금전적인 부분에서 내가 뭔가를 알아차리고 배신감을 느끼는 나에게 그는 왜 자기를 못 믿냐며 오히려 화를 냈었다. 그땐 사기 연애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또 사기 결혼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네가 알고 한 결혼이라고 우겨댔다. 아니 나는, 네가 빚이 있는 걸 알았어도 돈이 없다는 건 몰랐다니까. 한참 생각하고 머리를 써 봐도 이미 결혼식은 했고, 다행히 혼인신고는 빚을 갚기 전까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신혼부부 청약을 위해서도 있었지만 사실 불안했다), 신혼여행도 코앞으로 다가오니 도망갈 방법도, 구실도 없었다.
그래.. 내가 선택한 거지. 사기당했으면 뭐 어떡해. 내가 책임져야지.
프리랜서로 열심히 살아온 덕이 있는지 다행히도 결혼할 무렵 나는 남편보다 더 많이 돈을 벌었다. 물론 그만큼 야근에, 쉬는 날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열심히 하면 채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신혼여행도 내 돈, 시부모님, 나의 부모님, 결혼을 축하해 준 주변 지인들의 선물까지 내 카드로 쓰면서 지금까지 내가 너한테 해준 게 보람이 있다느니 내 마음도 모르고 헛소리를 해대는 남편을 보면서 뭔가 불구덩이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은 늘 나는 채워지지 않는 욕심쟁이, 사치스러운 여자라고 했지만, 나는 그저 열심히 산만큼 기대하고 그만큼 보상을 얻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보상은커녕 나의 작은 열심과 노력들로 그가 만든 의미 없는 구멍을 메꾸는 노동을 선물해 줬다. 굉장한 나의 신혼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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