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설에도 나는 서울에 있는 딸들에게로 간다. 이젠 이골이 날만도 하건만 아직도 울산 서울길은 멀고 고달프다. 그나마 이번 서울길은 아이들 집을 은평에서 양천구로 이사를 하고는 처음 가는 길이라 거리가 조금 짧아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네비는 100km를 남기지 않고 있으나 촌놈 기라도 죽일 요량인지 도통 차 발통이 굴러가질 않는다.
작은 녀석은 진작에 아빠 언제 오냐고 전화 왔으나 도로 사정은 내 맘 같지 않다.
큰 아이가 3시 50분 아바타 영화를 예약하려 한다고 전화가 왔다. 거리는 90km도 남지 않았으나 시간은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니 어찌어찌하면 영화를 볼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러자고 했다.
딸들과 함께 셋이서 홍대로 갔다. 시간만 한 치료제는 없는 것 같다. 2년이 흘렀다. 우리 가슴속 상처도 조금씩 딱지가 자리를 잡아가나 보다.
열심히 딸들 꽁무니만 쫓아갔다.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알지 못한다. 그새 딸들은 서울사람 다 된듯하다. 거침이 없다. 오히려 아빠를 챙겨가며 간다. 몇 년 새 역할이 바뀐 것이다. 그게 세월이기도 하고, 그렇게 또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고는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아바타가 새로 후속작을 찍었는지도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비록 셋이지만 이렇게 다시 영화관을 찾을 날이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4D영화관은 마치 놀이동산에라도 온듯하다. 내심 심하게 흔들려 팝콘이 날아가진 않나 하는 걱정이 살짝 들긴 했다.
익숙한 나비족 사람들 그리고 너무나 황홀한 배경 그러나 나는 설리의 대사 “아빠는 지키는 자다”는 그 한마디가 나를 흔들었다.
’ 당신과 함께 꿈꾸고 그렸던 우리의 미래 잊지 않고 모두 이루리다 영면하소서 나의 님이여 ‘라며 다짐했던 나의 약속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과정들을 영화 속 설리의 그 대사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당신이 떠난 이후의 내 삶은 숨 쉬고 있는 것 자체가 지옥이다 그러나 우리 딸들이 자기 날개로 창공을 힘차게 날아오를 때까지 내 역할을 다할 것이다. 그래야 다시 당신을 만날 그날 할 말이라도, 아니 내 죄를 조금이라도 갚지 않겠나 싶어 참고 또 참고 살아온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아내는 홀어미의 하나뿐인 아들인 오빠, 그 귀한 오빠를 어린 여동생이 밥이며 뭐든 챙겨 줘야 했고, ‘딸아가 똑똑해서 지 오빠가 못한다 ‘며 오빠보다 나은 것도 욕먹으며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왔던 사람이다.
나는 아들밖에 모르는 엄마 그리고 하는 것마다 다 안되기만 하는 아버지, 철저하게 자기만 아는 형, 천대만 받고 살아온 누나들 그리고 누나들의 희생 속에서 자란 막내아들이다.
아버지 사업이 기울고 내 청춘을 갈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대학 졸업장 하나 겨우 건진 오갈 데 없는 나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해준 아내, 그런 우리가 만든 가정은 어디 기댈 곳도, 의지처도 없이 오직 우리 가족힘만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가정은 더욱 소중했고 또 하나였다. 바로 설리 가족처럼.
다만, 설리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전장으로 뛰어들어 함께 싸움을 마쳤지만 나는 그 전장에서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남은 전투를 벌여야만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설리가족에 감정이입이 되어 몇 번이나 울컥거렸는지 모른다. 양 옆에 앉은 딸들 보기에 어찌나 민망하던지.
2년이 걸렸다. 명절 연휴에 이렇게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는 마음을 낼 수 있기까지.
딸들도 객지에서 살기 위해 애쓰고 또 많이 성장했다. 나도 가슴에 아내를 묻고 조금씩 조금씩 홀아비 생활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이 전투도 끝날 그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