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더 이상 3차원 공간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프록시마 캔타우리 항성계의 프록시마 b 행성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가까운 지구형 행성이라고 한다.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 성이 비교적 높다고 알려진, 하지만 그 거리는 빛의 속도로 4.2년이 결리는 말 그대로 4.2광년 떨어져 있는 행성이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자동차로 달리면 4000만 년, 초속 15Km로 달리는 우주선을 타고 가더라도 8만 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정말 멀고도 먼 거리이다.
이런 상상조차 어려운 거리의 세상은 천체 물리학 관련 학술지에 발표되거나 가끔씩 미디어에서 언급되는 내용 이외에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산다는 동질감조차 동의를 구하기 쉽지 않다.
김 초엽 작가가 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이란 소설에 나오는 워프 항법이나 웜홀 항법이 아니라면 우리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은 허상일 뿐이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하나로 연결되고 공유할 수 없는 세계라면 단지 외로움의 총합 만이 늘어나는 공허함이 가득한 공간의 개념이 존재하는 그런 세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크기는 어디까지 일까?
아침에 눈뜨면 가방을 메고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또 다른 지하철역에 내려 회사가 있는 건물에 들어가고, 다시 퇴근 시간이 되면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지하와 연결된 지하철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시 집 근처 지하철역에 내려 걸어서 집에 도착한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A라는 지하철 역에서 B라는 지하철역까지 인가?
아님 가끔 주말에 차를 타고 양평이나 속초라도 갈라 치면 내가 사는 세상은 서울에서 경기도 아니 강원도까지 인가?
TV 뉴스에서 남해안 일대에 태풍이 상륙한다고 연일 방송에서 화면을 쏟아낸다.
내가 그곳에 있지 않아도 같은 세상에 있는 게 맞는 것인가?
저마다 가늠하는 세상이 크기는 전부 다를 것이다.
사실, 세상의 크기라는 건 정의된 것도 없고 그 끝을 가본 사람도 없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세상은 모든 경우의 수를 위한 확률로 존재하고 선택의 순간 내 눈앞에 하나의 결과로 귀결되고 나는 그 순간 그 우주에 존재한다. 다중우주론을 믿지 않는다 해도 내가 한 선택과 선택하지 않은 다른 선택의 세상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Simulation 우주론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은 게임 속 세상과 같고 내 세상은 나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내 눈앞이 simulation 되어 펼쳐지고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 모든 세상이 미리 설정되거나 simulation 되어 있지 않다.
내가 다가가면 세상이 만들어진다.
역시 꽤나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의 선택과 내가 창조한 공간의 범위가 곧 나의 세상이란 이야기이다.
Goole maps time line 속에 지난 1년간 다녀온 이동거리가 기록되는 지도에 표기된 선택의 집합이 지난 1년간의 나의 세상의 boundry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3차원 공간에 한정되어 있고 거기에 시간의 흐름을 더해 표현되는 인식의 한계 안에서라면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공간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크기와 boundry를 그렇게 정의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우리에겐 또 다른 차원이 있다.
인식의 차원, 우리는 3차원 시공간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다.
3차원 공간 안에서 의식과 목적 없이 단지 어슬렁거리는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세계의 boundry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의식을 확장하고 창조해 나가는 일,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새로운 의식을 창조해나가는 일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영역을 확장하고 넓혀가는 일이다.
글을 쓰는 것, 매 순간 내 의식이 확장되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그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의 환희와 충만에 빠지기도 한다.
자연을 탐구하고 새로운 지식에 열정을 쏟는 일, 역시, 그 속에서 우리의 의식은 확장되고 무한한 세상을 접하고 넓혀 나간다.
우리는 한정된 시공간에 메몰 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공유하지 않은 세상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세상은 확장하는 우리의 의식과 함께 무한히 확장된다.
성능 좋은 우주 망원경을 통해 처음 접하는 우주 깊은 곳의 휘황 찬란한 먼지 구름 역시 우리 가 사는 세상의 일부라고 느낄 수 있는 건, 단지 우리가 그걸 바라볼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평이 이미 그곳에 닿아있고, 우리는 그 너머를 상상하는 다차원적인 존재 들이기 때문이다.
공유할 수 없는 세상에 우리의 외로움은 점점 더 커져 가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크기는 나의 의식 속에서 무한히 확장 가능하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처럼 우리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은하수를 여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