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건너는 여우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내 안의 나는 무엇이라고 답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모든 결정과 행동은 내가 진짜로 원하는걸 위해 하고 있는 게 맞을까?
사막을 건너는 여우는 그 끝에서 무엇을 얻기 위해 사막을 건너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맞닥뜨리는 하루하루에서 우리는 매 순간 원하는 것을 위해 살아 내고 있는 걸까?
고전역학에서 바라보는 결정론적 세계에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철저히 무시된다면
우리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조차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원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결과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건 아닐까?
누구나,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꿈을 위해 산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이 세상에 던져진 이유가 무언가 꼭 이루기를 위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경주에 참가하는 경주마처럼 앞으로 앞으로 미래로 미래로 향해 달려 나간다.
그 꿈이 경제적 자유이든, 명예이든, 권력이든 취업이든 사랑이든 행복이든,
마치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 탄 아이처럼, 살아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도달할 목표는 분명하고 원대할수록 좋다.
우리는 그런 존재가 맞는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그런 존재가 과연 맞는가?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살아야 하는 그런 존재가 맞는가?
우주의 나이에서 우리가 사는 찰나의 순간이 과연 목적성을 가지고 있기는 한 걸까?
우리는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
매 선택의 순간, 무한한 경우의 수로 확장하는 우주의 어딘가에선 모든 선택을 한 내가 존재할 것이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선 그 중간 어디쯤에 머무르는 나로 살면 되지 않을까?
성공한 나와 실패한 나와 그리고 한걸음 물러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내가 존재하는 세상,
그 세상이 지금의 내가 있는 세상이 되면 되지 않을까?
1년을 하루로 나누고, 하루를 시간으로 나누고 시간을 순간으로 나누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과 그 선택이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절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우스처럼
우리는 그 고통의 경주에서 내려와 지금 내가 달려가는 길 옆에 피어난 작은 풀꽃을 바라보고
바람의 방향을 느끼고 결승점 그 너머에 있는 하늘과 산과 강을 바라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내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게 되고,
매 순간의 최선이 결국은 나를 규정하는 내가 이 세상에 던져진 이유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멈추어도 쓰러지지 않을 거란 확신 보다, 때론 쓰러지더라도 그 역시 나의 존재 이유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막을 건너는 여우는 없다.
여우는 사막에 산다.
한 번도 여우는 사막을 건너려 사막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막이 그의 보금 자리고 생이고 생명이다.
여우가 처음부터 사막을 건너려 사막에 들어왔다면 삶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사막에 머무르고 그곳에서의 삶에 최선으로 살아가기에 여우는 사막 여우로 존재할 수 있다.
우리가 성공과 꿈이란 목표를 쫓아 고통에 매몰되고 현재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다면
이제 우리도 우리가 사는 사막이 얼마나 보석 같은 아름 다움을 숨기고 있는 곳인지
그걸 발견하고 향유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찰나의 시간에서 우리의 사막이 고통스러운 건 무언가에 늘 목말라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막여우는 절대 사막을 건너지 않는다. 사막에 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