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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폴리피와의 운동, 그리고 폴리피 아빠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선수가 된 나의 이야기]

by 나영

정기적으로 운동을 안 하는 폴리피가 밖에 나와서 운동도 하고 좀 돌아다니라고 힐링마장에 풀어줬다.

마방에만 있는 생활이 익숙해진 건지 힐링마장에 와서도 별로 움직이지는 않고 모래 냄새만 맡았다.

오랜만에 하는 운동이니 평보랑 속보만 조금 시켰다. 구보도 보내고 싶었는데 한두 번 하더니 안 했다.

프리런징도 안 해봤는지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내가 맘대로 했다가 오히려 잘못 배우거나 나쁜 습관이 들까 봐

그냥 오랜만에 넓은 곳에서 하고 싶은 거 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폴리피가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기뻤고, 앞으로 가능한 매일 폴리피가 운동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폴리피랑 마장을 돌아다녔는데, 신기하게 내가 가는 데로 따라왔다.

가다가 모래 냄새 맡고 창문 밖에도 한번 보고 하지만 내가 걸으면 따라오고 멈추면 자기도 멈췄다.

강아지처럼 졸졸졸 쫓아오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리고 폴리피랑 마방이나 수장대가 아닌 곳에서 시간을 보낸 게 처음이어서 너무 좋았다.


아직 밖에서 나는 조그만 소리에도 무서워서 목이 딴딴해지고 온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지만 다행인 건 폴리피는 무섭다고 앞발을 들거나 뒷발을 차거나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냥 얼음이 된다.

폴리피가 놀란 걸 다른 말들처럼 온몸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겁먹지 않고 폴리피 목을 쓰다듬어 주면서 진정되게 해 줄 수 있는 것 같다.

폴리피는 운동을 오랫동안 안 하다가 방목지나 마장에서 난리를 치지 않는다. 폴리피가 알아서 뛰어다니거나 뒷발을 차거나 로데오를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내가 마사회 들어오기 전에는 폴리피와 지금은 죽은 폴리피 언니인 올리비아피가 같이 운동하면 큰 마장 절반을 다 써야 할 정도로 체력이 좋고 힘이 넘쳐났다고 한다.

폴리피가 로데오를 하고 난리 치는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폴리피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폴리피가 나를 따라 졸졸졸 쫓아오는 모습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날의 운동이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폴리피와의 마지막 운동이 되었다.

교관님께 폴리피를 훈련시키고 싶다고 말씀드린 게 큰 실수였다.

폴리피가 마사회 교관님들께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셨던 교관님이 다른 분들께 폴리피에 대해서 여쭤보기 시작하셨고, 폴리피에 대해 들은 교관님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너무 위험하고 내가 다친다면 교관님이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정말 실망한 나는 그럼 수장대에 데리고 나와서 손질이라도 해도 되냐고 여쭤봤지만 그것도 안된다고 하셨다.

내가 꿈꿔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매일 마방 밖으로 나와서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환경에도 노출되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운동을 하면서 다이어트도 하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나오는 것 자체에 익숙해지면 둔감화 훈련도 하고 마방굴레 쓰는 것도 익숙해지게 하려고 했다.

폴리피를 마방 밖으로 아예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폴리피가 더 나은 말이 되게 해 줄 수 있을까?

나는 폴리피가 난리를 치는 말이 아니라 겁이 많은 말이고, 겁이 많은 이유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이고, 훈련을 받으면 충분히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지만

다른 분들은 폴리피가 바뀌지 않을 거라고 믿으시는 것 같았다.

희망을 잃은 나는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으려 했다.


+

폴리피는 속보 걸음이 너무 예뻤다. 훈련받은 적도 없을 텐데 이런 걸음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게 신기했다.

제대로 된 훈련을 받으면 정말 훌륭한 말이 될 텐데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폴리피 아빠는 DOAITSEN 420으로 네덜란드에서 엄청 유명했던 종마이다. 2009년 네덜란드 레이우아르던에서 열린 연례 종마 쇼에서 리저브 챔피언 종마상을 수상했고,

미국 승마 연맹에서 수여하는 프리지안 종마 올해의 말 상을 4년 연속 수상한 유일한 KFPS 승인 말이다. DOAITSEN 420의 다른 자손들은 여러 챔피언 타이틀을 확보하고,

1,2등급 프리미엄 등급을 받은 말들도 많다.

그렇다면 폴리피도 분명 재능 있고, 좋은 말일 텐데 폴리피에게 맞는 훈련을 제공해주지 않는 곳에 오게 되어서 이렇게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힐링마장에 있는 동안 폴리피는 계속 한쪽 창문 앞에 서있었다. 거기로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자기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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