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사랑.

by 김 예나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Human Acts. 소년이 온다. 중에서




요즘 한국은 추운 날씨만큼이나 추운 분위기를 지녔다. 꽝꽝 얼어붙은 아스팔트를 맨발로 걸어 다니듯

차갑게 쓰라린 아픔이 사람들에게 남았다.

얼마 전 일어난 제주 여객기 사건, 곳곳에 퍼진 산불 사건. 누군가의 가족, 친구, 동료였을 이름 모를 사람들의 가슴 아픈 이별로 남아 있는 슬픔 속에 잠식되어

가고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있다.

우울한 2025년이다.

슬픔으로 시작하는 한 해.

나는 참담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쩌다가 이런 안타까운 일이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

죽음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다면 바짓가랑이 라도 잡고 매달리고 싶다.

해서 죽음이 질려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고 도망을 친다면 난 기꺼이 그러고 싶다.

죽음은 추억이 되고. 삶은 현실이 된다.

많은 이들의 슬픔은 기억과 함께 서서히 잊히겠지.

하지만 그 사건으로 소중한 이들을 잃은 이들의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되려 더욱 선명해진다.

잊히지 않는 슬픔.

이들에게 죽음은 현실이고 삶은 추억이 된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그 시간 속에 머물러있다.

그리움 속에 살아가는 이들.

번역하기 힘든 슬픔.

언어를 잃어버린 슬픔이다.

우리는 슬픔 속에 잠식되어 간다.

하지만 나의 삶은 계속 나아간다.

거침없이 뒤로 돌아보지 않고 삶이 쉽게 살아지는 게

삶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철없게 생각했던, 쉽게 치부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들은 자신의 삶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자신들이 가진 것들 중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울음으로 채워 살아가는 사람들. 과연 얼마나 울어야 그 커다란 구멍이 다 메꿔질까? 상상조차 못 하는 슬픔.

나는 감히 짐작조차 못하는 슬픔과 죽음이다.

난 가만히 고개만 떨굴 뿐이다.

이것은 마치 연극적인 죽음이다.

빛을 잃어버린 죽음.

갑작스러운 빛의 깜박임이다.

밝았던 빛이 한순간에 꺼져버린 어둠.

삶의 급작스런 정전.

꿈을 꾸듯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들은 아무것도 잃어버린 적이 없다.

한 순간도 뺏긴 적이 없다.

사랑하는 이들 곁에서 영원히 살아있기에.

함께 영원히 살아가기에.

우리는 거짓말처럼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난 적 없는 기적 같은 것을 바라며 환상 속에 산다.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다.

이들에게 사랑이 남아있음을…

사랑할 힘이 아직 남아있는데 나눠 줄 사람이 사라졌다.

비록 부서졌을지언정 그대로 있음을 알기에…

그 기억이…그 사랑이 매 순간 고통임을…

하지만 그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강하게 하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살아간다.

자기만의 슬픔 리듬 속에 살아간다.

추억과 공허 사이를 헤매며…

그리워 울부짖을 이름들…

그 이름들 속에 살아있다.

여전히… 슬프게도.

얼마 전 또 슬픈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LA에 큰 산불이 났다.

역사상 큰 재난으로 기록될 만큼 엄청난 산불이

미국 LA전역을 순식간에 태워버렸다.

많은 생명들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꿈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생명이 빛을 잃어버리는 속도를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초록빛을 띠고 있던 산은 어느새 시뻘건 색으로 뒤덮인다. 나는 그 광경을 눈으로 목격한다.

암담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재난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진다.

할 줄 아는 게 그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뿐이다. 이다지도 참담한 상황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고작 쓰는 것 이라니… 난 한숨을 푹푹 쉬며 노트북을 닫아버린다. 요즘 현대사회는 도덕성이라는 면목하에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기 바쁘다.

또 sns라는 익명성 뒤에 숨어 판단하고 말하는 사람들. 우리는 타인을 너무 쉽게 비난한다.

언어의 고귀성이 실종되었다.

자비 없는 비난만이 존재한다.

때론 말들은 칼날이 되어 타인의 삶을 난도질한다.

마음에 피가 흐르고 작은 생채기가 난다.

생기 있던 영혼들은 메말라간다.

삶의 용기를 잃어버린다.

긴장감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사실 나도 다수의 뒤에 숨어 타인을 비난했었다.

익명성은 도망치기 좋은 구실이 되었다.

산을 넘었는데 또 하나의 산이 있다.

삶을 드러내니 또 하나의 삶이 나온다.

난 여전히 헤매고 있다.

공부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삶에 들이는 일.

나는 갈등, 고난, 폭력, 비판에 대해.

편견, 오해, 혐오에 대해 공부한다.

더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문학이 제자리를 찾기 위해.

아름답게 이별하기 위해.

나는 지금 어느 곳에 서 있는지

실시간으로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난 배움의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삶을 아름답게. 문학이 아름다울 수 있게

제 역할을 하겠다는. 약속에 가까운 다짐.

희연 시인님은 문학의 힘과 역할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통각을 깨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통각을 깨우기 위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빠지기보다 온몸을 맡길 때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처럼. 슬픔에 발버둥 치기보다 겸허히 받아들이며 삶이 다시 살아지기를 자연스레 기다릴 것.

시간이 약 이라는 뻔한 구절을 정말 이해하게 될 때가 있다. 클리셰가 클레식 이란 걸 알게 되는 순간.

그게 가장 정답에 가깝기에

우린 그 말에 기대어 삶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경사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나타났다. 나는 숨죽이며 경이로운 순간을 실시간으로 지켜본다. 나는 반복해서 그녀의 수상 소감을 들었다.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 중.


그녀의 말이 칼날이 되어 가슴을 휙 쓸고 지나간다.

삶의 핵심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난 폭력과 손잡고 있나? 사랑과 손잡고 있나?

무관심도 폭력이라면 난 폭력적인 사람일 것이다.

사랑을 주는 쪽에 가까운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아직도, 여전히 헤매고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답을 찾아간다. 난 자석처럼 이끌리듯 소년이 온다. 를 읽어본다. 읽는 내내 기분 좋은 불편함을 느낀다.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 영혼의 성장통.

내 안에 뭔가가 불쑥 자라난다.

이유 모를 가슴 통증으로 숨 쉬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덩달아 삶의 작은 위안도 얻는다.

내게 아직 양심이 남아 있어 불편한가?

삶의 용기가 부족한 나는 그저 기도 하는 마음으로

혹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SNS에서 동영상 하나를 봤다.

미국 미시간주의 작은 마을에서

정말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동네 서점인 세렌디피티 북스가 이사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무려 9천 권이 넘는 책을 어떻게 옮기느냐였다. 딱 한 불록 떨어진 거리라 이삿짐센터를 쓰기도 애매한 상황.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는데 놀랍게도 이사 당일 무려 300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몰렸다. 6살 어린아이부터 91세 할머니까지

심지어 휠체어 타신 분도 함께 나섰다.

책과 서점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이들 모두가 모였다. 마을 사람들은 두 줄로 길게 인간 띠를 만들어

손에서 손으로 책을 전달하며 자연스레 책 이야기와

웃음을 나눴다. 까마득해 보였던 이사는 주민들의 도움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동네 서점과 종이책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모이는 지역 공동체는 우리가 잊고 있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영상에 감명받은 나는 폭력과 혐오의 세상에서

다시 한번 온기와 사랑을 느낀다.

역시 그럼에도 사람은 사랑이구나.

나도 사랑 곁에 서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도가 더딘 삶이 술술 살아진다.

나는 아주 조금 알게 되었을 뿐이었는데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나의 안일함을 직면하는 일은 꽤 아픈 것 같다.

내가 알던 세상과 모르던 세상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다.

삶의 표정이 다양해진다.

삶의 색깔이 풍부해진다.

무채색에서 파스텔 색으로 바뀐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과정에는 일종의 선언이 필요하지 않을까?

난 사랑을 선언하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면 생각한다. 잔나비의 조이풀 조이 풀의 원래 가사는 해가 지는 곳 따라 걷다 보면 끝끝내 역전하리라!. 였다고 한다.

그니까 지는 방향으로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간 떠오르는 해를 다시 볼 수 있다는 믿음에 가까운 다짐.

어둠은 옅어지고 아침이 밝아오듯.

죽음이 죽고 삶이 살아난다.

삶이 그렇게 희망차게 떠오른다.

걷고, 걷고, 걷다 보면 삶을 역전하게 될 거라는 믿음.

그러면 그리운 얼굴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실낱 같은 희망을 품고

우리의 삶의 속도가 비슷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기도가 저들에게 닿기를.

잃었던 미소를 결국 되찾기를.

삶이 다시 제자리를 찾기를.

난 내 자리에서 내 역할을 다 할 뿐.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발견함으로써 나를 넓혀간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중.


타인을 돌보고 사랑하다 보면 자신의 대지도 넓어지고

사랑스러워진다고 믿는다.

문학과 사랑 안에서 무너지고 지키기를 반복하며

삶을 사랑스럽게 사는 것.

아름다운 의무.

잠식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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