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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녀사 Apr 01. 2024

무던육아와 미술치료의 만남

스물두 살의 군인 남편과 미대생의 결혼과 육아


“나 돈 많아, 아직 어리지만 아이와 너 책임질 수 있어. 믿어줘”

스물두 살, 얼굴에 모공 하나 없는 상병 남편이 군복을 입고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인+스물두 살+돈 많다는 3개의 단어는 프러포즈용 단어로 적절하지 않았고,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스물두 살의 명랑한 미대생이었던 나는 그의 말을 무한신뢰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지만 스물두 살의 군인 남편과 명랑한 미대생 나는 이른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스물두 살부터 시작된 나의 육아는 육아서에 언급된 것처럼 완벽하지 못했다. 9시 이전에 시작하라던 수면 교육부터 어그러졌고, 모유 수유조차도 내 맘처럼 되지 않아 초반부터 정석의 양극단에 있는 ‘야매육아’가 되어갔다. ‘육아의 정석’은 애당초 젊은 초보 엄마인 나에게는 물 건너간 수식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설펐던 나의 ‘야매육아’는 나만의 방식으로 육아의 틀을 다져갔던 과정이었다.


나름 어설펐던 나의 ‘야매육아’에서도 큰 틀은 존재했다. 틀은 딱 3가지였다.

하나는 자립이요.

또 하나는 신체 건강이요.

마지막은 정신건강이었다.

이 커다란 틀 안에서 나는 힘 뺀 ‘야매육아’를 하며 두 아이를 키웠다. 시간이 흘러 이 ‘야매육아’가 ‘무던 육아’라는 수식어를 얻기 전까지 말이다. 나의 무던한 육아를 실감했던 것은 과거의 어느 날 나의 육아 스타일이 무던하다는 것 같다고 언급해주는 지인 덕분이었다.      


10살의 큰딸과 5살의 아들을 키울 때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의 기억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여느 날과 같이 놀이터 생활을 하는 두 녀석과 함께 늦은 오후까지 흙냄새를 맡으며 놀이터에 있었다. 육아 동지였던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편의점 커피를 마셨다. 나는 목마름에 다 마셔버린 아이스커피를 아쉬운 마음으로 있는 힘껏 “쪽” 소리를 내어가며 탐닉하고 있었다. 채신없이 경박스러운 소리까지 내며 빨았을 것만 끝내 커피는 나오지 않았고 나는 뚜껑을 열어 얼음을 빨대로 요리조리 옮겨가며 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때였다.

“제시 엄마는 애를 참 수더분하게 키우는 것 같아” 남자 형제를 둔 육아 동지가 말했다. “아니, 큰 소리 한번 없고, 깐깐하지도 않고, 그냥 무던하게 육아한다는 느낌이 들어”      


응? ‘육아의 정석’과 양극단에 있는 ‘야매육아’를 실천하고 있었던 나는 내심 나의 육아 관에 대한 확실 감이 없었고, 오히려 젊고 미숙한 엄마라는 수식어를 듣지 않기 위해 줄곧 긴장되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나의 육아 관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해주는 타인을 마주하자 뭔지 모를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그저 “아.구.러.언.가.요?”라고 주먹만 한 얼음을 양 볼에 욱여넣으며 어눌하게 답했을 따름이었다. 때마침 오후의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놀고 있는 큰딸이 보였다. 오후 5시가 넘어갈 때쯤의 딸아이는 땀으로 머리칼이 젖어있었고, 양말만 신은 채로 흙 놀이터를 뛰어다니고 있다. 그제야 나의 입에 있던 얼음이 오도록 소리를 내며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나의 무던했던 육아 스타일에 대한 깊은 성찰은 2년 뒤 미술치료를 공부하며 일어나게 된다. ‘야매육아’로 시작하여 무던육아로 완성된 것이 젊은 엄마가 가진 깊은 열등감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큰 틀 안에서 건강하게 양육하려 노력했던 나의 신념을, 심리학자 아들러를 공부하며 알게 되었다. 아들러는 열등감을 부끄러워하며 부정적인 감정으로 감추지 않고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해 열등감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생활 방식이 올바르게 형성되어 긍정적인 자아실현을 돕는다고 하였다. 늘 젊고 어설픈 초보 엄마라 무던하게 키웠던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했던 나의 불안감이 미술치료를 공부하며 안도감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이렇게 줄곧 육아 관에 대한 불확실 감으로 주변의 칭찬에도 위축되었던 나는 미술치료를 만나며 우월감이라는 자신감을 달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미술치료사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서 갔고, 드디어 나의 무던육아에 진면모가 드러났다. 무던육아로 다져진 내공은 나의 일에 확장되며 주변에서 긍정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최근 사랑하는 자녀들을 잘 키우고 싶은 욕구로 무던함이 아닌 뾰족함, 예민함을 장착한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잘 키우기’의 ‘잘’이라는 무서운 부사의 등장으로 부모에게는 육아 스트레스를, 아이에게는 정서적 어려움을 유발하게 되며 ‘잘’이 골칫덩어리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가족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무던하게 미술 활동을 하며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나의 육아철학과 미술 수업을 궁금해했다. 도움을 주어야 할 친구들을 한 명 두 명씩 만나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직업이 되어 많은 친구의 마음을 무던히 읽어주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맨발로 놀이터를 거닐던 나의 작은 두 아이는 이제는 청소년기에 접어든 사춘기의 아이가 되었다. 신체적으로 과거보다 육아가 수월해질 때쯤 글을 써보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내 안에서 태동하기 시작했다. 절 때 순탄할 수 없었던 눈물겨운 지옥의 20대를 무던함으로 어떻게 견뎠는지, 무던한 육아가 미술치료라는 옷을 입으며 30대는 어떻게 진화했는지, 힘듦의 육아를 무던하게 견디고 무던하게 아이를 양육한 것이 어떠한 열매로 수확되는지 궁금한 40대의 두근거림을 글로써 써 내려 가보고 싶었다. 아직 많은 사람에는 다소 낯설 수 있는 미술치료라는 상담기법을 양육과 잘 버무려 아이를 잘 키워보자 하는 모든 이에게 무던하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큰딸의 이빨빠진 커피봉지 사자활동
수수깡 격파를 사랑하는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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