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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수혜자를 찾아라 1

by 하얀


이번 설날은 아무래도 오랫동안 친정을 다녀오려고 했어. 일정이 길어질수록 힘든 것도 곱절에 곱절이 될 것 같아서 출발 전에는 조신하게 있다가 가야지 생각했어. 그런데 인생은 생각처럼 안된다는 걸 또 알 수 있었지.


2월 4일

전날 교감선생님으로부터 갑자기 방송국 촬영이 있는데 동의하시냐는 전화를 받았지. 얼떨결에 좋아요 좋아요를 말씀드리고 아이들 출연을 흔쾌히 승낙했어. 잠시 후 찰리 친구 엄마로부터 전화를 받으면서 알게 되었어. 찰리만 찍는 게 아니라 몇 명의 아이들을 두고 인터뷰도 하고 생활하는 모습들을 찍고 싶다고 말이야. 촬영에 대한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는데 PD님이라는 걸 직감했어.

"나 전화 온다. 통화하고 다시 전화할게."

"안녕하세요~ 찰리 어머님. KBS 방송국 기자 OOO입니다. 이번에 새로 편성된 다큐 프로그램입니다. 도시에서 일부러 시골학교를 찾아온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찍고 싶은데요. 학교에서 찰리랑 몇몇 친구들을 소개해 주셨어요. 이번주 화요일 수요일 촬영 예정이고요. 목요일은 추가 촬영이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협조 부탁드려요. 그리고 내일은 친구들이랑 미리 인사도 하고 어머님들 뵙고 좀 더 자세한 설명과 도움을 부탁드리려고 하는데 시간이 되실까요?"

어떤 프로그램에 어떤 촬영인지도 잘 모르고 또 승낙했어. 내일 뵙자는 인사를 하고 달력을 보고 일정을 다시 확인해 보았지. 수요일 올라갈지도 모른다고 다 이야기했는데 수요일 올라가는 건 물 건너갔고, 목요일 아침에 가서 최소한의 일정만 소화해야겠다고 생각했어.


2월 5일

새벽부터 눈이 왔다가 멈추었다가 반복하고 있었어. 오후 4시에 기자님을 만나기로 했는데 계속 눈이 이렇게 온다면 아무래도 약속장소에 가는 게 어렵겠다 생각이 들었어. 걱정만 오후 내내 하다가 나가보니 그래도 바닷가 쪽은 눈보다는 비가 온 것 같더라고. 빨리 만나고 들어오면 큰 문제는 없겠다 싶었지.

아이 6명과 부모 5명 그리고 선생님과 기자님까지 13명이 바다와 산이 보이는 카페에서 만났어. 기자님이 오셔서 너무 멋진 카페라고 깜짝 놀라며 말씀하시더라고. 아마도 시골학교 시골생활 이런 거 구상하시면서 영화 '집으로'에 나오는 그런 깡시골을 생각하신 것 같았어. 여기 아이들이 시골생활도 시골생활이지만 누구보다 힙한 생활을 한다는 걸 모르셨던 것 같아. 겨울이면 스키장을 다니고 여름에는 서핑과 여러 가지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아이들이고, 동해 바다가 보이는 맛집을 종종 즐기는 도시에서 온 시골아이들인데 말이야.

생각보다 길어지는 설명을 들으면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촬영이 되는지 알아가기 시작했지. 기자님은 누군가가 주인공이 있길 바라시더라고. 물론 나머지 친구들도 나오지만 좀 더 이야기가 있길 원하셨던 것 같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찰리는 나오는데 체리는 안 나오게 될 것 같더라고. 체리가 좀 서운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찰리와 찰리친구는 잠시 더 남아달라고 하셨어. 학교가 끝나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친구네는 놀러 가는지, 아침은 어떻게 시작하는지, 많은 질문들과 대답들이 오고 가는데 내 눈은 창밖에 쌓이는 눈만 보고 있었지.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빨리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내 걱정과 달리 찰리와 찰리친구는 주인공이 되었다면서 좋아했어. 실제로 찰리는 주인공이 아니었는데 기자님의 말씀에 찰리 본인이 주인공이라고 착각하기도 했어. 찰리는 한 10시간 정도 행복했지.

나는 쌓이는 눈을 보며 운전이 걱정되기 시작했어. 찰리 친구 엄마는 아이들 등교부터 찍게 되는 상황이 돼서 눈 걱정보다 다음날 아침 걱정을 더 하기 시작했지. 아침 걱정이든 눈 걱정이든 빨리 집에 가서 정리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 조금 더 길어진 인터뷰에 집에 오는 시간이 배가 되었어. 7번 국도를 20킬로로 달려오는데 벌벌 떨면서 왔지. 도착하고 보니 온몸이 녹초가 되는 것 같았어. 당장 녹초가 돼서 쓰러지기 전에 아이들 밥도 챙겨야 하고 내일 촬영이기에 일찍 일어나야 하기도 했어.

찰리 친구 엄마는 내일 아침 7시부터 카메라가 온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그나마 우리 집이 선택이 안된 게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어.


2월 6일

아침부터 약간의 부지런을 떤 것을 제외하면 난 너무 평화로웠어. 심지어 체리까지 학교에 가게 돼서 나는 이틀간 점심에서 해방이 되기도 했지. 아이들 스쿨버스 태워 보내고 나니 내가 딱히 할 일은 없더라고. 어제 분명 기자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부모님들이 해줘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해당되는 것이 없었어. 그렇게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면서 촬영 전에 만난 친구들 말고도 학교에 나오는 다른 친구들까지도 촬영에 흥분해 있더라고. 그중 한 친구는 TV에 나오고 싶다며 결국 인터뷰에도 성공한 아이가 있었지.

"엄마~ OO언니는 TV에 너무 나오고 싶데. 언니 인터뷰 했는데 말 엄청 잘하더라. 그리고 내일도 또 나오고 싶데!"

"좋겠네. TV에 나오고 싶어 했는데 너무 좋았겠다. 계 탔네 계 탔어!"

첫 모임 때 같이 있던 친구가 아니었는데 아이가 적극적으로 하니까 방송에도 나오고, 역시 노력하기 나름인 거야. 생각지 못한 방송 수혜자라고 생각 들었어. 그리고 오후에 다른 엄마와 통화를 했지.

"OO이 방학이라 학교 안 간다고 했다며?"

"아니~ 간데. 방송 찍는다고 남은 기간 학교 다 간데~ 안 간다고 그래서 이틀 동안 어쩌나 했는데... 덕분에 나 일도 하고 감사할 뿐이다."

수혜자가 한 명 더 늘었어. 방학 동안 돌봄 안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이번에는 먼저 학교를 간다고 하니 아이 엄마가 더 신났지.

우리 집 아이들은 전 날 눈으로 더 신나게 놀고 학원까지 갔다가 6시에 들어오는 환상적인 스케줄을 보내고 왔어. 나도 좀 좋은 시간이 되는 것 같았어.


2월 7일

촬영에 동의한 엄마들이 모두 바쁜 날이었어. 집에서 촬영을 하게 된 엄마도 있었고, 겨울 바다 서핑을 다녀온 엄마도 있었고, 엄마들 밴드 촬영도 추가돼서 밴드부 엄마들도 모두 소집되었어.

나는? 나는 독서부인 게 감사했어.

그리고 7일 날은 양양에서 동아리 간담회가 있어서 아이들 점심을 주고 바로 간담회를 가려고 했어. 나는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덕분에 간담회에 여유 있게 갈 수 있었지. 매번 시간에 쫓겨서 부지런히 와야 했는데 우리 동아리 회장님과 좀 더 이야기도 나누고 와서 여유가 흘러넘쳤지.

이제 곧 애들이 오니까 저녁 준비하러 들어가 보자 생각했어. 슬슬 일어나서 저녁 준비 하려는데 전화가 왔어.

"하얀아, 체리는 학교 버스를 안 탔데!"

"아 그래? 어디 있는데?"

"중광정리에 있는데 아직도 촬영 중이래."

"중광정리까지 데리러 가야겠네..."

"그럼 찰리는 오고 있는 건가?"

"찰리? 찰리는 집으로 가라 그랬는데?"

집에서 아이들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학교 근방까지 데리러 가야 될 것 같았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좀 귀찮았지. 촬영이 제시간에 끝나서 버스 타고 오는 줄 알았는데 아직도 촬영이라고 하니 언제 끝나나 싶기도 했어. 그때 생각지도 못하게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

"어머니~ 찰리도 중광정리에 내려줄게요~"

"네? 네!"

왜 그쪽으로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아이가 가고 있다는 연락만 받았어. 어차피 체리 데리러 가야 하니 가보자 싶었지. 촬영을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엄마 이름이 전화기에 떴어.

"하얀아! 찰리도 중광정리로 왔어. 내가 촬영 다 끝나면 둘 다 데리고 갈 테니까 오지 마~"

닌 그렇게 1시간 30여분의 자유시간이 추가되었어. 저녁준비를 하려던 걸 멈추고 잠시 누웠어. 하루종일 집에서 엄마들의 전화를 받으며 이동경로를 들었던 하루를 떠올려 봤어. 처음부터 촬영에 합류하기로 한 집이던 중간에 갑자기 합류하게 된 집이던 모두 바쁜 하루를 보냈더라고. 아이들도 이틀이 지나고 촬영을 해서 좋았다고 하면서도 힘들다고 했지. 주인공이라서 좋아했던 친구는 촬영이 힘들어지자 눈물을 보이기도 했어. 촬영을 같이 한 집 중에서 유일하게 아무것도 안 한 엄마는 나뿐이더라고.

나는 이틀 동안 올해 겨울방학 중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누렸던 것 같아. 알고 보니 이 촬영의 최대 수혜자는 나였던 거야.


촬영 중 기다리고 있는 찰리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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