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직이 흐르는 사랑

by 여산희


푸릇푸릇한 아카시아잎을 눈으로 더듬고 있었다. 유월 중순이 지나며 폭염주의보가 발령됐다. 더위는 연일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그래서 숲을 찾고 나무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잠시나마 불볕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한 잎 한 잎 따면서 사랑을 예측하곤 하는 아카시아잎. 작은 가지에는 20여 닢이 맺혀 있었다.


몇 걸음 떨어져서 볼 때는 온통 초록빛이었다. 그런데 한 잎씩 자세히 살펴보니 사정이 달랐다. 멀쩡한 잎이 있는가 하면 벌레들이 갉아먹은 잎이 있었다. 군데군데 생채기가 나거나 바람의 매질로 귀퉁이가 떨어진 잎도 있었다. 외양은 저마다 다르지만 잎들은 결코 생기를 잃지 않았다. 내 눈길은 가지를 지나 나무의 몸체에 닿았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쳤다. 나무는 잘리거나 뿌리가 뽑히더라도 결코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잎들을 꼬옥 쥐고 있을 것이다. 잎들이 이런저런 풍파를 겪으면서도 찡그리지 않는 것은 나무라는, 흔들림 없는 초석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내리사랑처럼 말이다.


얼마 전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다. 큰 수술을 받고 사선을 넘었다. 잘 회복되고 있지만 걱정을 지울 수가 없다. 올해 86세인 아버지는 지금까지 크게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다. 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일 욕심이 많지만 연세에 비해 무척 건강하셨다. 무탈한 부모님은 오 남매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덜컥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자식들에게는 비상 상황이었다. 큰누나와 형을 중심으로 신속하게 손을 썼다. 아버지를 서울의 믿을 만한 병원으로 모셨다. 진료와 수술도 지체되지 않고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장에 커다란 림프종이 생겼는데 지방의 작은 병원에서는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였다. 천만다행히 실력 있는 의사가 집도를 맡아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지금은 아버지가 어서 기력을 회복하고 평온한 일상을 되찾기를 기원하고 있다.


부모의 사랑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아버지는 투병하느라 하루하루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런 처지에서도 옆에서 간병하고 문병하는 자식들을 걱정하신다. 고향에서 아버지의 무사 귀환을 간절히 기다리는 어머니도 혹시나 자식들 몸이나 상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신다. 오 남매 모두 50대가 넘었지만 부모님에게는 여전히 아까운 자식인 것이다. 그렇다. 자식을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그지없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설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말이다. 물의 여러 미덕 중 한 가지가 내 마음에 깃든다. 맑은 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풍경이다. 나무에게는 물관이 있다. 뿌리에서 흡수된 물이 이동하는 통로다. 나무는 물관을 통해 줄기나 잎까지 두루두루 에너지를 보낸다.


사람에게는 심관(心管)이 있다. 그 통로에는 여러 가지 사랑이 흐르고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줄기는 내리사랑이다. 존재의 근원을 흐르는 고귀한 흐름이라 하겠다. 나직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물, 그 아름다움에 자꾸 젖어드는 여름밤이다.


2023년 6월 20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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