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중학생 시절을 보내본 남성분이나
중학생 아들을 키워본 어머님들이
읽으시길 간절히 바래 본다.
아이를 갖고 내 이름이 없어졌다.
나는 산모님으로 불렸으며
출산 후에는 ‘oo엄마’로 불렸다.
이름만 없어진 게 아니었다.
운동 하나 하지 않고 지켜온
내 균형 잡힌 미듐 사이즈의 몸매도 없어졌으며
그로 인해 자존감은 땅굴을 파고 있었다.
내 이름 석자 걸고 일하던 여성이
어느 날 갑자기 한 번도 내 이름이 불리지 않고
하루 종일 젖을 짜는 소가 되어 있었다.
나는 친정 엄마의 유전으로 인해
뽀얀 참젖과 젖몸살을 물려받았다.
나의 참젖은 차고 넘쳐서
유축해 놓으면 너나 할 것 없이
집 앞에 줄을 서서 받아갈 정도였다.
애기가 황금똥을 싼다고 아이 아빠들이
그렇게나 함박웃음을 지었더랬다.
과일을 사들고 와 매번 퇴근길에 유축한 젖을
받아가신 아빠들도 있었다.
그러나,
젖몸살은 일주일에 한 번은 119에 실려갈 정도였으며 유축은 2시간마다 했어야 했다.
밥 먹고 유축하고 젖 먹이고,
밥 먹고 유축하고 젖 먹이고,
밥 먹고 유축하고 젖 먹이고..
아이가 아무리 예쁘다지만..
유축하느라 손가락이 떨렸으며
손목이 뒤틀리는 통증과
손에 쥐가 나는 상황에서는
이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나랑 소랑 다를 것이 없구나..’
육아는 힘든 정도가 아니었다.
젖몸살로 온몸이 굳어가는데도
등에 센서 달린 딸아이가 깰까 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슴 위에 놓고 재웠었다.
그놈의 센서는 초~ 예민하게 작동하여
숨 쉬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 상황에서
점점 가슴이 굳어가는 고통..
그 위에 잠드는 딸을 보고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흘린 눈물은 젖몸살의 아픔도 있었지만
당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나의 희생정신! 이름하여 모성애를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이건 희생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희생을 실행하게 강요하는 것이었다.
뭐든 단계별로 배워야 하거늘..
육아에는 단계별 학습이란 게 없었다.
산후우울증.
들어봤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우울증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12층 집에서 발코니를 바라보는데,
얼마 전 뉴스 기사가 생각났다.
산후우울증으로 아이를 안고 뛰어내린..
‘아~ 정말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구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너무 힘들었다.
내가 아닌 ‘소’로 살아가고 있는데
남편은 말이 없다.
내 얘기를 들어줄, 내 마음을 만져줄
누군가가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 고생 후,
아이를 낳고 맞는 내 생일날.
남편이 케이크와 족발을 사들고 들어왔다.
난 남편 앞에 앉아서
내 마음을 얘기했다.
“오빠..
내가 산후우울증인가 봐요.
그 뉴스에 나오는 그런 게 나한테..
오늘 내가 이상했어요.
내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고
발코니 보는데 눈물만 나고..”
울면서 힘든 마음을 어렵게 얘기했다.
무려 한 시간 넘게.. 나만..
나 스스로가 위험하다고 느꼈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안 하는 대화를 이어보려 애썼더랬다.
남편은 생각보다 얘기를 잘 들어줬다.
그 어떤 대답이나 호응도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넘게 울며 얘기한 내게
드디어 남편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헉.
이건 말인가? 막걸리인가?
한 시간 넘게 설명했건만..
한 줄 대답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머리도 굳고 몸도 굳고
눈의 동공도 굳었었다.
그리고 놀란 입도 벌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굳어있는 나를 보고 남편은 현관문을 나갔었다.
난 미친 듯이 울었다. 한참을..
그러다 남편이 들어왔다.
남편이 들어왔을 땐
자존심이 상해 울고 싶지 않았다.
그냥 혼자 흐느끼며 울었었다.
남편은 나의 감정에
그 어떤 동요도 못 느끼는 듯했다.
이때 직감했다.
그리고 포기했다.
‘아~ 이번 생은 망했구나..
이번 생은 한 사람 인간 만드는데 의의를 두자.
그래~ 이 생은 좋은 일만 하다 가는 거야!’
며칠을 서글프게 흐느끼며 울었다.
혼자만의 시간은 땅굴을 팠지만..
침묵은 의외의 가르침을 주었다.
처음엔
“남편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인데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왜 그럴까? 왜 그랬을까?
나를 싫어해서일까?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일까? ”
이런 생각들로 땅굴을 파고 파다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내려가니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었다.
‘오~~ 내 남은 인생 아까워서 어쩌나..’
이 생각에 또 일주일을 울었다.
그리고 정신 차렸다.
‘아까운 내 남은 인생을 구하자!
어떻게든 메이크업 해보자!
내가 살 방도를 찾으리라!‘
그때도 10년 넘게 선생질해 본 나였다.
분석완료.
결과는 ‘강의대상층 파악 미흡’으로 판단되었다.
예전에, 친하게 지낸 나이 많은 학과장님께서도
젊은 교수들 앞에서 말씀 주셨었다.
“왜 남편하고 대화를 하려고 하세요?
대화라는 건, 사람과 사람이 하는 겁니더~
근데 그들은 ’ 아메바‘에요.
아메바와는 대화하는 거 아닙니더! ”
그때 박장대소하며 웃었었다.
이게 내 일이 될 줄도 모르고.
’ 산후우울증이라고.. 그러니 나 좀 안아주고
나 좀 신경 써주고 나 좀 사랑해 주라고 ‘
이렇게 똭~ 얘기했어도 알아듣기 힘든 사람한테
내가 유치원생을 앉혀놓고 천자문 읽은 격이고
중학생 앉혀놓고 논문 읽어준 격이다.
수준이 똭~ 중학생이었다.
중2병.
들어봤을 것이다.
그 어떤 얘기를 들어도 듣지 못하는 말 안 통하는 시기.
오직 본인 생각의 프레임에 갇히는 시기 중2.
그 시간 그는 중2 아들이었다.
이 여자가 왜 이러나 이해 안 되는..
오로지 1인칭 주인공 시점만 이해하는 시기.
그는 단지 그 한 시간이 의문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우울증 치유하고자 했다가 화병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이 나은 것은 맞다.
우울할 겨를이 없었다.
앞으로의 숙제가 산더미였으니까..
이걸 나았다고 하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런 상황에서도 천만다행인 건,
힘든 과정을 겪을 때마다
주변에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
한 팀이 되어 같이 욕해줄 내 편이 있다는 건
일확천금보다 소중할 때도 있다.
내겐 두 살 많은 친구 같은
선생님(직장 동기)이 있다.
우린 항상 입모아 남편들 흉을 신랄하게 하고
매번 이렇게 마친다.
그래도 쓰도 못하는 장동건보다
내 것 아닌 현빈보다
그래도 이 놈들이 나은 거라고.
이 놈들 어떻게든 달래 가며 살아야지 어쩌겠냐고.
우리 팔자가 말년에 대박나려나봐~
도대체 얼마나 대박 나려고
지금 이리 힘든 걸까.. 하며..
몇 년 후..
이 말은 ’씨‘가 되어 현재 나는 대박 중이다~
이따금 아침에 아름다운 소리를 듣는다.
‘조심조심~ 설거지 물소리‘
두 딸과 자고 있는 와이프가 깰까 봐
조용히 설거지를 하는 남편.
저녁에 힘들고 귀찮으면 가끔 설거지를 패스 한다.
그럼 아침 6시면 출근하는 남편이
그 설거지를 해놓고 출근한다.
그릇 부딪치는 소리 안 나게 조심하는 물소리는
아침을 아니 새벽을 정~말 행복하게 해 준다.
나는 새벽 이~ 설거지 물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들린다~^^
(그래도 이건 이거! 저건 저거! 란 말 아시쥬?)
얼마 전 남편 친구 중에 대기업의 임원이 된,
남편의 자랑인 친구가 잠깐 한국에 들어 왔다.
그는 안동 억양의 안동 언어로 내게 물었다.
“제수씨! 우리 ㅇ기 어떻게~ 고등학교 올라가쓰요?“
난 0.1초의 지체 없이 바로 대답한다.
“아유~ 중2병이 쉽게 안 끝나네요.
아주 아예~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아웅~ 좀 도와주세요~~~”
‘씹세’에서 ’중딩‘으로 등극한 남편
12년째 중딩이다~
우리 ’중딩 아들‘ 더는 안 자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