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따고, 덖고, 마시며
아침에 눈 뜨면 가장 먼저 차를 우린다. 커피의 깔끔한 맛과 진한 향은 어느 것도 대체 불가능이라 여겼는데 속달동을 오가며 변화된 것 중 하나다. 철마다 오는 꽃과 여린 잎을 따서 말리고 덖으며 차와 친해져 간다.
속달동 봄은 차 만드는 일로 시작된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산수유는 우산 모양의 아기자기한 꽃송이가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 꽃을 통째로 따서 말리면 국화차처럼 은은한 노란 빛깔의 차를 즐길 수 있다. 맛도 향도 부드럽다.
늦가을에 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도 씨를 빼고 말려서 차로 만든다. 가을볕을 가득 담은 매혹적인 열매는 오미자청 같은 볼그레한 빛을 찻잔에 토해낸다. 산수유나무 한 그루에서 두 계절을 맛보는 셈이다.
나무에 물이 오르고 연둣빛 어린 잎새가 가지마다 깨어나는 5월엔 감잎을 따고 뽕잎도 딴다. 갓 나온 반짝이는 여린 잎은 꽃보다 눈길이 간다. 한 해 마실 만큼 조금씩만 따서 햇차로 마신다.
감잎차는 다른 차에 비해 향은 덜하지만 비타민C가 다량 함유되어 감기 예방에 좋고 피부 미용에도 효과가 있다. 감 꽃이 피기 시작하는 단오 무렵까지 채취한다.
막 움튼 뽕나무 잎새는 유난히 빛나서 반짝이는 윤슬 같다. 뽕잎차는 피를 맑게 하여 심혈관 질환에 좋고, 당뇨에도 탁월한 효능이 있다. 5월의 싱그러운 햇살 속에서 뽕잎을 따면서 이미 마음은 차 한잔을 마신 듯 맑아진다. 서리 맞은 뽕잎이 약효가 좋다고 하여 늦가을에 따기도 한다. 덖을 때 구수한 향이 나고 맛은 녹차보다 순하다.
5월은 캐모마일 따는 시기이기도 하다. 꽃 모양이 계란프라이를 닮은 개망초꽃과 흡사하지만 노른자 부분이 봉긋하게 올라와 있어 개망초꽃과는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생 꽃잎에 따뜻한 찻물을 부으면 사과향이 상큼하게 퍼지기 때문에 땅에서 나는 사과라고도 한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함'이라는 꽃말에 맞게 한 겨울 영하의 날씨에도 잎새를 땅에 깔고 파릇파릇 살아있다. 심신을 안정시키고 숙면을 취하게 하는 효능이 있어 저녁에 차 한잔이 생각날 땐 캐모마일을 우린다.
페퍼민트는 번식력이 대단하다. 친구가 지인집에서 얻어다 주었는데 밭 한 모퉁이를 다 차지했다. 비교적 향이 강하여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항염 및 항산화 작용이 뛰어나고 기관지를 튼튼하게 하며 멘톨 성분이 주는 시원한 청량감이 매력이다.
여름부터 늦가을까지는 메리골드 천국이다. 메리골드 역시 생명력이 강하여 꽃밭은 물론이고 텃밭까지 메리골드 세상이다. 지인들에게 속달동 햇살과 바람을 전할 수 있는 소박한 선물용으로 틈틈이 따서 말린다.
꽃차는 찻잔에 피어나는 꽃잎을 보며 지나간 계절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향도 색도 은은하게 퍼져나서 대접받는 기분이다. 게다가 메리골드는 눈에 좋은 루테인과 지아잔틴을 함유하고 있어 노안에 도움을 받고자 즐겨 마신다.
건강을 위해서 차를 마시기도 하지만 사회생활의 일부로 정서적인 면으로도 차는 한몫을 한다. 차 한잔 하시겠어요? 누군가에게 건네는 한마디가 의례적인 인사일 수도 있지만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때로는 차 한잔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도 한다. 반면, 고요히 홀로 마시는 차는 생각이 정리되어 자신을 다스리는 시간이 된다.
다산 정약용이 18년 강진 유배 생활동안 기거하였던 다산초당에 간 적이 있다. 숲에 가려 하늘 한 뼘 보이지 않는 작은 초당인데 주변에 차나무가 많아 다산이라 불렸다. 그곳에서 차로 마음을 다스리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써냈고 가까이 있는 백련사의 혜장스님과 차를 나누며 위로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차나무를 가꾸고 차를 마시며 차를 사랑하였으니 다산에게 차는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감히 다산을 흉내 낼 수는 없지만, 차는 이제 내게도 일상이 되어간다.
마당에서 자라는 꽃과 나무에서 찻잎을 따고 꽃잎을 따는 일은 즐거움이고, 차를 말리고 덖는 기다림의 시간은 일종의 명상이다. 한 계절을 담아낸 차를 가까운 사람에게 선물하는 기쁨도 크다. 무엇보다, 차를 마시는 일은 나를 마주하고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멈춰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는 차 한 잔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다. 힘들고 지칠 때 기댈 수 있는 친구와도 같다.
새해 아침, 차 한 잔을 놓고 오감을 깨운다. 찻주전자에 물 따르는 소리로 청각을 깨우고, 우려 지는 꽃 차의 고운 색을 보며 시각을 열고, 차 향으로 후각은 물론이고, 따뜻한 찻잔을 감싸며 촉각까지 깨운 후 마지막으로 차를 마시며 미각을 연다. 차 한 잔이 이렇게 온몸으로 스민다.
차 한잔 하시겠어요?
올해는 나에게도 누군가에게도 좀 더 자주 이 말을 건네고 싶다. 이 한마디가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누군가의 언 마음을 녹일 수도 있지 않을까. 추운 겨울, 따뜻한 차를 나눌 수 있는 여유와 온기를 안고 사는 삶이고 싶다.
아지랑이 꼬물대는 마당에서 어서 햇차를 만들고 싶어진다. 벌써부터 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