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을 읽고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은 후 어느 서점을 가도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가득했습니다. 몇 해 전 <채식주의자>만 읽은 저는 한강 작가의 작품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그중 제 눈에 들어온 작품은 <희랍어 시간>이었습니다. 원문이 희랍어인 신약성서를 매주 읽고 설교해야 하는 목사로서 제목에 희랍어가 들어간 점이 반가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라는 책 뒷면 소개 글을 읽으면서, 말을 잃어가는 사람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사람의 빛이 만나는 시간 속에서 희랍어가 무슨 역할을 하는 건지, 다른 언어도 많은데 왜 희랍어인지 궁금했습니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갑자기 실어증에 걸리고, 어쩔 수 없이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고등학교 1학년을 보냅니다. 그러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학교에서 불어 수업을 듣다가 갑자기 다시 말을 하게 됩니다. 실어증의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처럼 왜 다시 말을 하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이유를 모르면 어떻습니까? 다시 말을 하게 되었으면 됐지요. 그녀는 말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 후 출판사와 편집대행사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실어증이 찾아옵니다. 심리치료사는 어머니의 죽음, 이혼과 양육권박탈 등이 원인이라고 여기지만 정작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고등학교에서 처음 배우기 시작한 낯선 언어인 불어가 실어증을 고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불어보다 더 낯선 언어인 희랍어 수업을 듣습니다.
그녀가 듣는 희랍어 수업의 강사가 남자 주인공입니다. 그는 유전적 이유로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희랍어 강의를 계속합니다. 그에게 희랍어는 어떤 의미일까요? 늦은 십 대의 나이에 한국에서 독일로 간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독일 학생에 비해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희랍어는 달랐습니다. 희랍어는 주인공뿐 만 아니라 독일학생에게도 낯선 언어였고, 그렇기에 유일하게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낯선 독일에서 살아야 하는 그에게 더 낯선 희랍어의 세상이 안식을 준 것이지요.
이처럼 소설 속 주인공에게 희랍어가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은 ‘낯설음’ 입니다. 이 낯선 희랍어가 반복되고 굳어진 현실을 비틀어 주길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언어를 만들어내고, 남자는 빛을 만들어내길 바랐던 것이죠. 그러나 희랍어의 의미가 ‘낯설음’만이라면 꼭 희랍어 일 필요가 있을까요? 산스크리트어, 히브리어처럼 지금은 사라져서 우리에게 낯선 언어는 희랍어 말고도 더 있습니다. 다른 언어가 대체할 수 없는 희랍어만의 이유와 중요성은 없을까요?
소설이 직접 말하는 희랍어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능동태와 수동태만 있는 다른 언어와 달리 희랍어에는 중간태가 있는 점입니다. 사랑하다라는 동사를 예로 들면, 능동태는 주어가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고, 수동태는 주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이지만, 중간태는 주어가 사랑하면서 그 사랑하는 행위로 인하여 주어 스스로도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소설에는 희랍어로 자신의 철학을 펼친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태도 말합니다. “앞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죠. 지금 눈이 내리고 있지 않지만, 겨울이 되면 적어도 한번 눈이 올 것입니다.”
소설이 말한 희랍어만의 특징을 소설 주인공에 연결시켜 볼까요?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는 수동태도 능동태도 될 수 없습니다. 말을 못 하고 보지 못하는 상황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능동적으로 다 막을 힘도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간태에서 살아갑니다. 말과 눈을 잃어가는 수동적인 상황에서 나름의 능동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그 몸부림이 희랍어 수업을 통해서 현실 속에서는 아직 볼 수 없고 말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잠재태의 희망을 발견하고자 애쓰는 일입니다. 나아가 희랍어 중간태에서 주어, 동사, 목적어 모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처럼, 말과 빛이라는 소통의 도구를 잃어버린 두 사람이 희랍어 중간태의 시공간에서 서로 만나 서로에게 새로운 소통의 도구가 되어줍니다.
"왜 희랍어이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제 자신 역시 주변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동시에 영향을 받는 중간태의 시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 익숙한 하루를 비틀어 줄 나의 희랍어는 무엇일까? 내가 발견해야 할 잠재태의 희망은 무엇일까? 내가 얻어야 하는 새로운 소통의 도구는 무엇일까? 나의 하루도 희랍어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