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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만에 데미안을 이해했어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읽고

by 세미한 소리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첫 장 제목은 “두 세계”입니다. 주인공 열 살 소년 싱클레어는 부유하고 따뜻한 부모님, 그리고 친절한 누나들과 함께 안전하고 사랑이 넘치는 세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크로머라는 힘세고 무서운 동네 형이 등장해서 싱클레어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갑니다. 그 세계는 안전하고 따뜻한 부모님의 세계와 달리 추하고 불쾌했지만 동시에 강렬하고 매혹적이었습니다. 열 살 소년 싱클레어의 평온했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소설 <데미안>이 시작됩니다.


2006년 가을 <데미안>을 처음 읽는 저는 싱클레어에게 격하게 감정이입했습니다. 2006년 제게도 "두 세계"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3년 간 사역했던 도시 교회의 교육 전도사를 사임하고, 2006년 1월부터 전남 보성에 있는 시골 교회의 담임 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 담임 목회도 처음이고, 시골에서 사는 일도 처음이고, 부모님 집에서 독립하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6월에는 결혼도 했습니다. 소설 속 싱클레어처럼 나름 평온했던 제 세계에도 균열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열 살 소년과 스물 일곱 청년이 함께 <데미안>의 세계로 걸어갔고,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소설 속에서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준 쪽지는 제 마음에도 전달되었습니다. 싱클레어가 치열하게 살면서 알을 깨고 나와 자유롭게 날아가는 과정을 읽으면서, 저도 치열하게 살면 아들과 학생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른과 목회자의 세계로 날아갈 수 있다는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처음 읽은 <데미안>은 제게 힘과 위로를 준 성장 소설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도 많았고, 불편한 내용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신비로운 데미안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랐고, 싱클레어가 친구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부인을 사랑한다는 점이 불편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19년 만에 다시 <데미안>을 읽었습니다. 이번에 읽었을 때에는 처음보다 조금은 더 깊이 그리고 넓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하고 불편했던 내용들이 소화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낸 지난 19년 동안의 삶이 제법 헛되지 않은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알에서 나와 새로운 세계에서 날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이번에 소화한 <데미안>을 나누려고 합니다.


<데미안>을 이해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두 인물이 있습니다. 니체와 칼 융입니다. 헤세는 니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데미안> 읽기에서는 니체의 '초인' 개념에서 도움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시대 상황 속에서 많은 이들이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니체는 인류의 미래적 이상형으로 기존의 도덕과 가치 체계를 초월한 존재인 초인을 제시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자기 극복과 창조를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소설 속 데미안이 초인의 모델인 것이고, 싱클레어와 독자는 데미안과 함께 새로운 세상에 어울리는 초인이 되어가는 것이죠.


다음으로 헤세는 칼 융의 제자 랑 박사에게 분석받으면서,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융은 사람에게는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페르소나가 됩니다. 반대로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모습은 속으로 감춥니다. 이렇게 외면된 모습이 무의식에 억압되는데, 융은 이것을 그림자라고 부릅니다. 융은 가면이 얼굴을 대신할 수 없듯이, 남들에게 보여주는 페르소나가 나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인정해야 하고, 반대로 남들에게 숨기는 그림자는 나 자신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과정이 개성화작업인데, 이를 통해서 사람은 나 자신, 융이 말하는 self(자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시선으로 보면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부모님의 세계에서 얻는 착한 페르소나를 벗고, 크리머와 사춘기 시절 감춘 그림자는 다스리면서, 참된 자신의 모습인 self(자기)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에바부인은요? 융은 개성화 과정을 통합의 과정으로 봅니다. 그림자와 페르소나가 통합되고,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남성들은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아니마)과 통합되고, 여성들은 남성성(아니무스)과 통합되어야 합니다. 이 시선으로 보면 에바부인은 친구엄마가 아니라 싱클레어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여성성 아니마입니다.


초인, self(자기), 아니마뿐만 아니라 <데미안>이 전하는 많은 의미들이 전보다 더 생생하고 다채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얻은 결론만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자신이 갇혀 있는 알을 깨고 더 나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서 보다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사실 제 부족하고 짧은 글과 해석이 담기에 <데미안>은 너무 크고 깊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는 불안해하며 주저하는 누군가에게 각자의 알을 깨고 나오라며 용기를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불안하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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