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변신>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첫 문장입니다. 자고 일어나니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는 설정이 단박에 마음을 붙잡습니다. 아마도 한두 번쯤 이런 상상을 해봤기 때문이겠지요. 공주나 왕자가 되는 상상,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이 되는 상상,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되는 상상, 여러분은 상상 속에서 무엇이 되어 보셨습니까? 참여하고 있는 독서 모임에서도 같은 질문을 나눴는데 나비, 독수리, 고래, 맹수, 하늘에서 내리는 비 등으로 각자가 변하고 싶은 존재가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 잠자처럼 흉측한 갑충으로 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벌레로 변하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 끔찍한 경험을 합니다. 우리의 몸이 벌레가 되지는 않지만, 우리의 마음이 벌레처럼 비참하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천식으로 몸이 아픈 어머니, 어린 여동생을 대신하여 혼자 보험회사 외판원으로 일합니다. 일은 고되고 외롭고 힘듭니다. 어쩌면 몸이 가장 나중에 벌레가 된 것이고, 잠자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벌레가 되어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잠자는 당시 노동자를 대변합니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존중받지 못했고, 마치 기계의 부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한순간에 부품이 되어 버린 비참함과 벌레가 되어 버린 비참함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4차 산업혁명 속에서 일하는 우리는 그때에 비해 얼마나 나아졌을까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일하고 공부하면서 비참함을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경쟁에서 뒤처질까 봐 늘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열심히 하면 할수록 지치고, 조금씩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시나요? 우리의 마음도 조금씩 벌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이처럼 일에서의 소외가 사람을 비참한 벌레로 만듭니다. 그리고 또 다른 원인도 있습니다. 바로 관계에서의 소외입니다. 잠자가 힘들고 지쳐도 계속 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족이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 자신을 향한 가족들의 기대, 기대 안에 담긴 사랑과 존경이 잠자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잠자가 벌레로 변해서 돈을 벌지 못하고 오히려 짐이 되자, 가족들의 태도가 변했습니다. 더 이상 잠자를 존중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잠자를 위협하고, 사과를 던져서 그의 몸에 박아 버립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아무런 보호도 하지 않으며 외면하고 방치합니다. 처음에 잘 돌봐주던 여동생도 나중에는 그를 버리자고 말합니다. 효용가치가 없어진 잠자의 존재는 가족들에게 존중받지 못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가족들의 차가운 마음과 태도가 등의 박힌 사과처럼 그의 마음에 와서 더 아프게 박힙니다. 문득 걱정이 됩니다. 제가 말로, 표정으로, 무관심으로, 때로는 행동으로 던진 사과들이 가족이나 주변 이들의 마음에 박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괴롭습니다. 그리고 괜스레 마음 한쪽이 욱신거립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제게 던져서 마음에 박힌 사과들 때문이겠지요.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사과가 박혀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과를 던졌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던진 사과로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벌레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벌레가 되는 일을 멈추고, 다시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요? 사랑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전에는 찬송가 143장 <웬말인가 날 위하여>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1절 가사 때문이었죠.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을 벌레라고 말하는 점이 늘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가사 때문에 이 찬양에 은혜받습니다. 세상과 남들은 효용가치가 없다고 사과를 던지고 소외시키며 우리를 벌레로 만들지만, 예수님은 벌레로 변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크고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존재 그대로 안아 주시고, 우리는 그 안에서 위로받습니다. 이처럼 사랑이 우리를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지켜줍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랑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나 자신을 그리고 함께하는 이들을 존재 그대로,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