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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한 소리 Jul 15. 2022

낙원의 주소를 알려드릴까요?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을 읽고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 <낙원>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소년 먼저. 그의 이름은 유수프였다. 그는 열두 살 때 갑자기 집을 떠났다.” 


 정말로 갑자기 주인공 유수프는 아버지 빚 때문에 상인에게 팔려서 집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집을 떠난 사람이 있었는데,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입니다. 구르나가 태어난 동아프리카의 섬 잔지바르는 복잡하고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1498~1698)였다가 오만 제국의 속국(1698~1890)이 되었고, 영국의 보호령(1890~1963)이었다가 1963년 12월 11일에 술탄을 지도자로 하는 독립 군주국이 되었고. 독립 후 한 달 뒤에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을 무너뜨렸고, 196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동아프리카 해안지역 탕가나카와 합해져 지금의 탄자니아가 되었습니다. 혁명과 탄자니아 수립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주도했는데, 그때 아랍계, 아시아계 그리고 혼혈 아프리카인들은 학살당하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여파로 많은 비흑인 아프리카인들이 잔지바르를 떠났고, 그때 구르나도 갑자기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참고: <낙원>의 해설. p324~326)

 

 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독자 역시 갑자기 집을 떠난 자들입니다. 보호자 품에 있던 아가는 그 품을 떠나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는 사춘기라는 우당탕 여행을 거쳐 성인이 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예상하지 못한 떠남은 반복됩니다. 감히 유슈프와 구르나의 경우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떠남의 순간이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결론적으로 작가, 독자, 주인공 모두 갑자기 집을 떠났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책 제목처럼 낙원에 다다랐을까요? 


 독자로 낙원을 향한 여정에 참여한 저는 처음에 힘들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정서가 낯설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보다 유슈프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그를 산 상인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그래서 그들은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유가 있었습니다. 


 “동아프리카로 모여든 사람들은 거기에서 독특한 다언어적, 다인종적 문화를 형성하며 역동적으로 살아왔다...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섞이면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혼종적 정체성이 생겨난 것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국가의 이름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는 이유도 그들을 묶어주는 것이 국가가 아닌 혼종적 정체성이기 때문이다.”(p329) 


 어느 나라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체성과 태도를 가지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저를 예로 들어 볼까요? 제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한민국 사람? 개포동 주민? 장소와 환경에서도 영향을 받겠지만, 전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목사, 기독교인, 가족, 성도, 친구, 책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혼종적으로 제게 영향을 주고, 저는 그 안에서 나름의 정체성과 태도를 만들겠지요. 그리고 정체성과 태도는 제가 하는 말, 행동, 표정, 몸짓으로 모양과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제가 누구인지 설명해줍니다.     


 여정의 종착지 "낙원"도 같은 맥락입니다. 유슈프에게 부모님의 집은 낙원이 아니었고, 부유하고 친절한 상인의 집도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에덴동산 같은 아름다운 동아프리카의 자연도 낙원이 아니고, 영국, 독일 같은 힘 있는 국가가 만든 공동체도 낙원이 아닙니다. 소설 속에 낙원은 없었고, 소설 밖에서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체성이 국가와 사는 장소에 있지 않는 것처럼, 낙원도 특정한 장소와 주소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낙원은 장소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과 태도에서 생겨납니다. 어떤 장소에 있던지 건강한 정체성과 성숙한 삶의 태도를 지녔다면, 그 장소가 곧 낙원이 됩니다.  


 저는 소설 <낙원>과 함께한 여정을 통해서 낙원에  다다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낙원의 주소는 알아냈는데, 여러분께도 알려드리겠습니다. 


 “낙원은 자신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정체성과 태도에 있다.” 


 이제 주소를 알았으니, 낙원으로 떠나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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