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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미한 소리 Feb 10. 2023

낡은 다이어리 바인더가 살아남는 길은?

 작년 12월 9년 동안 사용했던 다이어리 바인더를 교체했습니다. 평소 사용하는 물건마다 고장 내고 망가뜨리는 마이너스의 손인 제가 9년 사용했으면 제법 오래 사용한 편입니다. 물론 바인더가 박물관에 있는 근대유물 정도로 심하게 너덜너덜 해진 상태이기에 아끼면서 잘 사용했다고 자랑할 수 없지만요. 그러나 그 원인이 저의 마이너스 손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인더가 인조가죽이었던 점도 어느 정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이번에는 9년보다 더 오래 사용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탈리아의 사과 주스 산업에서 발생하는 사과껍질에서 셀룰로오스 섬유를 추출하여 만든 비건 사과가죽 바인더를 구입했습니다. 


 며칠 뒤 새 비건 사과가죽 바인더와 2023년 속지가 배달되었습니다. 신나서 새 바인더에 새 속지를 끼워 넣었고, 기존 바인더에서 필요한 자료들도 옮겨 넣었습니다. 완성된 다이어리는 멋져 보였고, 이 멋진 다이어리에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하면, 다 잘 될 것 같았습니다. 반대로 속지와 모든 것을 빼버리고 덩그러니 남겨진 예전 다이어리 바인더는 어제보다 훨씬 더 낡아 보였습니다. 어제도 이미 충분히 낡고 너덜했지만, 하루 만에 마치 1년은 더 사용한 것처럼 더 낡고 보잘것없어 보였습니다. 실제로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 텐데, 왜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먼저 비교 때문입니다. 매끈하고 흠집 하나 없는 새 바인더가 낡은 헌 바인더를 더 흉측하게 만든 것이죠. 비교가 하는 일이 늘 이렇습니다. 누군가를 납작하게 만들고, 쭈그러뜨려 버리죠. 비교 안 하면 되지 않냐고요? 비교 안 하는 일이 가능합니까? 속세를 벗어났다고 하는 종교인들도 서로 만나면 작은 것 하나까지도 비교하고, 많은 점이 닮은 쌍둥이들도 서로 다른 점을 굳이 찾아내 비교합니다. 그 결과 누군가는 비교로 힘들어하지요.  



 다음 이유는 바인더에서 속지를 다 빼버린 점입니다. 바인더에 속지가 있었을 때에는 비록 겉모습은 낡고 너덜해도 다이어리로서의 기능과 목적은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지를 빼 버린 순간 더 이상 다이어리의 기능과 목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낡고 볼품없는 바인더만 남았습니다. 다이어리라는 정체성 혹은 자존감마저 빼앗기고, 완전히 무너진 것이죠. 


 다이어리에게 정체성과 자존감이 어디 있냐고, 과몰입하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과몰입. 왜냐하면 낡은 바인더가 꼭 제 자신 같았거든요. 혹시 나도 저 바인더처럼 사용되고 소모되어 낡고 쓸모없어지면 어떡하지? 그래서 쓸쓸히 버려지면 어떡하지? 새 바인더처럼 멋진 비교대상들이 나타나 나를 납작 뭉그러뜨리면 어떡하지? 세월에 따라서 나는 조금씩 낡아질 것이고, 매 순간 비교가 던지는 그물에서 도망칠 수도 없을 텐데, 어떻게 나는 잘 살아낼 수 있을까?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


 앞서 말한 두 번째 이유에서 그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속지를 끼우면 됩니다. 만약 제가 2023년 속지를 헌 바인더에 넣고, 새 바인더에는 속지를 넣지 않았다면, 아무리 새 바인더가 멋지다고 할지라도 헌 바인더가 제 다이어리가 될 것입니다. 낡고 오래된 다이어리가 되겠지만, 그럼에도 다이어리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지켜내겠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속지를 계속 채워가는 사람은 비록 모든 비교에서 우위에 설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속지는 어떻게 채우는 겁니까? 다이어리에는 과거의 일도 적고,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적지만, 그 중심은 현재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이어리를 통해서 결국 원하는 일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속지를 채우는 일도 동일합니다. 지금 여기(Here and Now) 현재를 살아가는 일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 미래에 대한 전망과 희망, 비교 우위와 경쟁력도 필요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지금 여기, 그리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일이 바로 속지를 채우는 일이고, 그럴 때 우리는 비교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각자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나답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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