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봄방학이 없어지면서 겨울방학이 길어졌다. 중간에 일주일이라도 학교를 가면 잠깐이라도 숨통이 트이겠지만 60일을 아이들과 삼시세끼 해 먹으며 지지고 볶고 우당탕당 보내고 있으니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평범함과 지루함이 반복되는 나날이다.
큰아이는 친구들과 하루 여행을 다녀온다고 한다.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타도시로의 여행이다. 놀거리, 먹거리를 찾으며 친구들과 톡을 주고받는다. 아이 얼굴엔 기대와 설렘이 가득이다. 시선을 조금 옆으로 옮기니 시무룩한 둘째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오빠처럼 친구들과 놀러 가고 싶다는 둘째를 달래 줄 내일은 그녀에게 특별함을 선물하고 싶은 날이다.
그날 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이셨을까?
내가 어떻게, 왜 갔는지 모르지만 떠오르는 기억 속엔 난 엄마와 단둘이 동물원에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삼촌이 큰언니와 둘째 언니만 데리고 동물원에 갔는데 그때 나도 따라가고 싶다고 한참을 울었다. 엄마는 그런 내가 안쓰러우셨을 것이다. 그래서 무더운 여름날 날 데리고 동물원에 가셨던 것 같다.) 최대한 날 예쁘게 꾸며주고 싶으셨던 건지 아님 내가 원해서 입고 간 건지 모르겠다. 붉은색 브이라인에 공주옷처럼 어깨뽕이 한껏 부풀러 진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대관람차도 탔다. 무서워서 엄마 옆에 딱 붙어 있었지만 높은 공중에서 내려다본 동물원의 광경은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엄마와 동물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솜사탕을 만났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푹신푹신한 구름모양에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달콤함은 당장이라도 혀끝을 갖다 대고 싶은 맛이었다. 엄마는 내 두 손에 분홍색 솜사탕을 쥐어 주셨다. 솜사탕을 두 손에 들고 있는 자체만으로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문제는 그때부터다. 솜사탕을 손으로 조금씩 떼어먹은 것뿐인데 내 손과 입엔 온통 끈적거리고 정체 모를 물질들로 가득했다. 그때 당시 물티슈만 있었어도 문제 될 것도 아닌 걸 그 발명품이 뒤늦게 나와 엄마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혼났다. 손과 얼굴에 묻어 있는 끈적거리는 물질들은 엄마의 흰 손수건으로 좀처럼 닦이질 않았다. '그러니 더운 여름날 솜사탕이 뭐야', '좀 조심히 먹지', '버스 타고 가야 는데 얼굴이며 손이며 어쩔 거야'하며 엄마한테 혼났던 기억이 더 크지만 그래도 내 기억 속에 잊히지 않는 엄마와의 첫 데이트였다. 그날은 나도 엄마에게 특별함을 선물 받은 날이다.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는 둘째의 취향을 고려해 공예체험을 신청했다.
공방 도착한 우리는 선생님께 설명을 듣고 먼저 흙으로 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릇을 디자인하고 그에 맞게 흙으로 조금씩 눌러 가며 만들었다. 이제 4학년이 되는 딸은 차분히 앉아 꼼꼼하게 이리저리 살피며 그릇을 만들고 물레 체험도 했다. 중심만 잘 잡으면 어렵지 않다고 하셨지만 좀처럼 모양이 잘 잡히지 않았다. 선생님 도움으로 겨우 물레와 조금씩 친해질 때쯤 옆을 보니 둘째는 자유자재로 자기가 만들고 싶은 모양을 만들며 신나 보였다. 큰 그릇을 만들었다가 주둥이 가 긴 호리병도 만들고 자유롭게 물을 묻혀가며 흙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어른인 나는 뭔가 새로운 걸 할 때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생각처럼 손도 잘 안 움직이고 두려움이 생기는데 나보다 어른스러운 둘째 모습에 또 다른 아이의 모습을 발견한다.
부드럽고 촉촉한 흙의 매력에 푹 빠진 둘째
"오늘 어땠어?"
"엄마. 너무 재미있었고 그릇이 빨리 완성돼서 거기에 짜장면 먹고 싶어요. 그릇이 어떻게 완성될지 진짜 궁금해요."
"그릇에 짜장면 담아 먹으면 후루룩 후루룩 얼마나 맛있을까요. 히히히"
둘째는 벌써 짜장면 두 그릇은 먹은 표정이다.
"와~ 엄마 이게 그릇 만든 거예요?"
"응. 둘째랑 엄마랑 만든 거야."
"어때?"
"와. 멋져요. 잘 만들었어요." 그릇에 담긴 짜장면을 본 아들은 눈이 반짝인다.
"어서 먹어봐. 예쁜 그릇에 담아서 짜장면도 더 맛있을 거야."
"그럼 내 것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엄마 내가 더 잘 만들었잖아요. 크크크"
큰아이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둘째는 당당히 말한다.
"그럼. 만들기 어려웠는데 끝까지 꼼꼼하게 완성해서 예쁜 그릇이 된 거지."
"오빠. 어서 먹어봐."
"엄마. 짜장면 하나 추가요. 두 개는 먹어야겠어요. 하하하"
내 앞에서 엄지 척해주는 큰아들의 환한 웃음이 보기 좋아 나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인생은 누구나 비슷한 길을 걸어간다. 결국엔 늙어서 지난날을 추억하는 것일 뿐이다.
영화 어바웃타임에 나오는 명대사처럼 우리는 모두 비슷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오늘 하루 남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을 뿐이지만 그런 날도 우리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먼 훗날 이 시간들을 추억하길 바라며 일상을 특별함으로 선물하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