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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09. 2021

나만의 공간

<부엌에서 자라는 나무들>

 

이사 오기 전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식탁을 10인용 원목으로 짜서 맞춘 것이다. 딸의 키는 172센티 두 명의 아들은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고 나를 포함해 가족 모두 몸무게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5인 가족이라고 하지만 6인 식탁도 좁게 느껴졌다.

식탁을 맞추고 난 뒤 기존 설치되어있는 가스레인지를 뜯고 전기레인지와 오븐을 큰 것으로 바꿔 설치했다.

그리고 식탁 옆 벽지는 먹음직스러운 탐스런 포도넝쿨 송이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하단부에는 열매에 맞는 요한복음 15장 16절의 영어 성경구절을 집어넣은 이미지 홀 벽지를 제작해서 붙였다.

이렇게 신경을 쓴 것은 주부로서 가족들에게 양질의 음식을 편히 만들어 제공하고자 하는 뜻도 있지만, 하루 중 이 공간을 제일 많이 사용하는 나만의 공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은 바보 아니면 얼간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신경전을 벌인다.

“인생 망했어! 3등급 나왔어”

“공부하면 걱정이 없어지는데, 하지도 않고 망하는 것을 택하고...”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아! 내 인생에서 빠져요. 대학 안 갈 거예요!”

“여긴 내 집이니 네가 나가는 게 맞지? 공부도 문제지만 너의 태도가 문제야!”

지필평가를 백점 맞고도 수행평가를 제대로 제출하지 못해 3등급의 처참한 결과를 놓고 결국 남편과 아들은 서로의 마음뿐 아니라 내 맘을 할퀴어 놓는다.

냉랭한 분위기를 바꾸고 서로 다른 자신의 입장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할 수 있도록 ‘엄마 찬스’를 발휘해야 한다.

하루 정도 지나 팽팽한 각자의 힘의 균형이 깨져 갈 때쯤,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의 궁합을 따져 단번에 반할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자존감을 세워야 할 음식 말이다.

예를 들면 남편이 좋아하는 연포탕과 약간의 주류를 준비하고 아들이 좋아하는 스테이크나, 닭의 날개나 봉을 간장소스에 재워 튀겨내는 음식을 내놓는다. 엄마가 음식 하느라 고생하는 분위기를 알기에 누나와 형은 은근하게 둘을 끌고 들어온다.

그러면 남편은 기본적으로 술이 생각나서 자리에 앉게 되고, 식탐 많은 아들도 마지못해 앉는다.

음식 앞에서는 서로의 면상을 살피면서 조금은 넉넉하게 바라보려고 하는 맘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참을성을 가지고 끝까지 얘기할 수 있도록 후식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야 그 시간은 길어진다.

내 방이 없기에 나의 책상도 물론 식탁이다.

우선은 노트북을 옆에 놓고 인터넷 강의를 듣다가 그러면서 조금 지루하면 150-50센티의 파란색 깔판과 종이를 깔아 내 영역을 표시하고 먹물과 붓을 준비해 글씨를 쓴다.

물감과 물통까지 놓으면 식탁의 반은 이미 물건으로 꽉 찬다. 코로나 학번인 큰 아들은 2년째 학교를 한 번밖에 가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군대에 끌려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익숙하게 자유로움을 즐기는 것 같다.

“시간은 인간이 쓸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다”, “짧은 인생은 시간의 낭비에 의해 더욱 짧아진다”등 아이에게 주고 싶은 글귀들을 써보며 연습한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과민하지 않게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눈에 띄는 곳에 붙여 놓는다.

성질은 고약한 데가 있는데, 교양 있고 자애로운 따뜻함을 가진 딸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인터넷 레시피를 찾아 음식을 만든다. “엄마, 정종이나 미림 있어요? 엄마 치킨 스틱 있어요? 엄마 칠리파우더 전복소스는요?” 모든 재료와 그릇들이 벌써부터 산만하게 나와 있다.

설거지 그릇그릇이 초반부터 쌓이는 지경이라, 내가 하는 게 낫다 싶다가도 온전하게 참고 기다리면 젊은이의 감각적인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

먹으면서 하는 말 “엄마 부엌엔 모든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된 재료들이 많아서 좋아! 엄마 짱!” 하며 엄지를 쳐든다.

이럴 때면 벽 포도송이 밑에 있는 보라색 글귀들이 나를 보고 어깨를 토닥이는 것 같다.

한그루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기 위해 잘 견뎌내고 있다고.

“ You did not choose me, but I chose you and appointed you to go and bear fruit. fruit that will last. Then the Father will give you whatever you ask in my name. "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선택하여 세웠으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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