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한.
간만일세. 평안한가.
자네 가족의 무운과 건강을 빌지.
올해 첫 비가 오네. 누가 이다지도 사립문을 두들기나 하여 창을 열었더니 반가운 손님이었지 뭔가. 축축한 우향(雨香)에 문득 자네 얼굴이 그리웠네. 하여 붓을 들었지. 들고 보니 이 붓도, 벼루도, 모다 자네가 준 것이군. 잘 쓰고 있네.
어린 것은 티가 나는지, 저기 꼭 우리 같은 동무 둘이 비를 맞고 있군. 감모가 들겠어.
기억나는가. 언젠가 이 빗속이 좋아 자네와 나, 흠뻑 맞으며 쏘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꽃님 자라라고 내리는 비일 텐데 엉뚱한 아해들이나 실컷 좋아했지. 그렇게 맞다 맞다 지치면,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네. 작은 우릴 삼킬 듯이 내리던 빗줄기가 세상 전부인 것처럼 보였어. 그때 자네와 난 스승님을 참 두려워했는데, 그날만은 그 무서운 얼굴이 흐릿했네. 빗물이 섞여 그랬겠지. 다시 그리 뛰놀 때가 오겠는가. 답은 알고 있으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게.
성균관에 가던 날에도 비가 내렸던가? 뒤늦게 안성댁이 부랴부랴 슈룹을 챙겨 쫓아와서는 외려 신나 하던 자네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지. 그는 아직도 알지 못할 걸세. 그렇게 옴팡 비를 맞고 욕탕에 몸을 담갔다가 뜨끈한 구들장에 몸을 지지면 천상이 따로 없다는 것을. 그건, 마무리까지 완벽한 우리만의 놀이라는 것을. 하기야 다른 이가 모를수록 좋지.
아, 그 비 덕분에 그날 밤, 자네 방으로 무사히 숨어든 기억도 나는군. 참, 자리가 바뀌어 잠을 설치는 도령이라니. 얼굴만큼이나 고이 자란 티가 나지 않았나.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고 날 기다리던 자네 모습이 생각나는군. 가인(佳人)이 따로 없다는 말은 농이 아니었네. 인상 펴시게. 성균관 시절이었잖나. 풋풋한 그때만의 한 시절이지.
우린 어렸고, 평범했고, 생각이 짧았네. 그래서 불같았지. 후회하지 않네. 자네와 했던 모든 것들을. 요즘 들어 그때 생각이 자주 나는군. 그리워하는 건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자연의 이치인데 늘 새롭단 말이야. 아니 그런가?
자네가 혼례를 올리던 날은 되레 하늘이 맑았지. 참 다행이라 생각했어. 벗이 생의 반려를 맞이하는 날에 습기가 가득해서는 영 모양이 살지 않으니. 그런 눅눅함은 나와 있을 때면 족하지, 안 그런가. 나의 신께 기도했네. 사랑을 알게 하셨으니 영원토록 이들을 보살펴달라고. 나의 사랑은 되었으니, 자네의 것은 반드시 지켜달라고, 해님이 자네 얼굴에 눌러앉은 듯했네. 들뜬 그 낯이 신기하면서도 나는 모르던 표정이라 기분이 묘했지. 와중에 품성이 고운 여인과 연을 맺어 참으로 천생연분이라 생각했네.
동기들은 짓궂게도 자네의 신방을 염탐하자 하였는데, 크게 내키지 않았네. 솔직해지자면, 손바닥이 근질거렸지. 이럴 땐 군자의 덕을 버리지 못한 몸뚱아리가 원망스럽더군. 그래서 그네들이 마실 물병을 모다 술로 채워놓고 뒷문으로 빠져나왔다네. 왜, 그 꼴사납던 박사의 잔에 장난질 쳤던 전적이 있지 않은가. 제 버릇 개 못 준 것이지. 새벽닭이 울 때까지 근처 강가에서 조약돌이나 세었어. 행복에 겨운 자네 얼굴이 떠올라서. 그 얼굴이 오래 남기를 바라면서. 초여름에 밤바람이 서늘하더군. 바람이 더 불었으면 했네.
윤이 태어나던 날, 그날은 구름은 한 점이 없고 그야말로 완연한 가을이었네. 내자와 아이를 염려하는 자네를 위해 선운사에 머물고 있었지. 내 곡기를 아니 들고 있으니 주지께서 그러셨네. 아이의 앞날에 해가 뜬 날만이 가득할 것이니 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그가 여아든, 남아든, 굳건한 사주를 타고날 것이라고. 안심했지. 사주 정도야 얼마든 인력으로 바꿀 수 있다, 생각했는데. 그 말씀만은 온 마음으로 믿고 싶었어. 하여 부처께도 부탁드렸지. 태어날 아이는 언제 어디서나 행복해야 한다고. 앓지 않고 천수를 누려야 한다고. 천주쟁이의 말이라 흘려들으실까 반신반의했는데, 부처는 역시 자비로우시네. 기어 다니던 윤이 벌써 저 언덕을 뛰어다닌다니. 그래, 자네와 내가 달리던 그 언덕 말일세.
아스라이 훑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 때로군. 자네가 어찌나 울던지, 외려 내자께서 건넨 인사가 더 기억이 생생하지 뭔가. 지킬 이들이 있으니 자네가 날 따라오는 것은 아니 될 말이고, 우린 더는 어릴 수 없었네. 비가 온다 하여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갈 나이는 아닌 것이지. 새벽에 바람이 너무나 차게 불어, 배웅 나온 자네가 퍽 걱정되었네. 떠나는 순간마저 벗에게 염려를 심어주다니. 모진 사람일세.
그립기야 하였지. 하나, 평온히 지낸다 생각하면, 들리지 않는 소식이 되레 기쁜 소식이다, 생각하면 자네의 얼굴을 못 보는 것 정도는 별일 아니었네. 실은 지나온 모든 세월이 그러했지. 벗이란 이름으로 내가 보지 못할 자네의 얼굴을 홀로 상상하는 것으로 난 충분했어. 평생을 그리했으니, 사는 곳 달라진다 하여도 괴롭지 않았네.
참으로 많은 세상을 보았네. 높은 성벽과 휘황찬란한 등불과 부드러운 비단에 파묻혀 넋을 놓은 이들도 보았고, 끝없는 연기에 무기력하게 땅을 기는 이들도 보았지. 실은 이 세상에 행복보단 불행이 더 많은 듯했어. 실낱 같은 희망이 보이다가도, 다시 절망이 덮치는 날이 반복되었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 위태롭지 않았네. 이 땅에 평등과 실학의 가르침을 위해 한 몸 내던지는 이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네. 조정의 거대한 괴물에게로 한 발씩 다가설 때마다 떨리는 두 다리가 온전히 느껴져도, 언젠가 이 육신이 찢겨 흩어질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지. 들이닥치는 관군들을 바라볼 때, 아이러니하게도 자네의 얼굴이 떠올랐네. 그 순간, 내가 제일 보고팠던 얼굴을. 평생을 사랑하던 얼굴을.
인한. 부탁 하나 하지.
늘 그렇듯 평안해주게. 온전해주게. 앞으로도, 우리가 다시 얼굴 볼 날은 없을 것이지만, 만나지 못하여도 행복해주게. 내자와, 윤과, 그리고 자네의 다른 벗들과 함께 하루하루 벅찬 삶을 살아주게. 이 세상에 미련은 없지만, 그것 하나만은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군.
내가 사랑하는 나의 신께서 이 미천한 몸을 부르시네. 그에게 가야겠어. 이만 인사하지.
나중에 또 보세.
서이운 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