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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작 Oct 09. 2022

우울한 여자와 사랑하는 법

거실은 조용했다. 그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훌쩍 사라지고 싶다는 대목에서는 움찔, 몸을 떠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는 꼿꼿하게 자리를 지켰다. 말이 사라진 뒤에는 나의 숨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앞만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안아줄까?"

     

덤덤하기도 지나쳐 차라리 차갑다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의 부드러움에 어울리지 않았다. 하마터면 그 의미를 알아 차라지 못할뻔했다.

     

"위로인가요?"

"아니." 

  

그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눈이 보였다. 길고 숱 많은 나의 흑발 사이로 짙은 갈색인 그의 눈이 보였다. 적당한 물기와 밝은 빛이 조화로운. 풍성하고 결 고운 속눈썹이 돋보이는.


근래에 내가 제일 사랑하는 그것.     


“춥잖아.”

“별로요.”     


그가 잠시 침묵했다. 그래서 나는 웃었다. 짓궂은 대답에 없는 말을 찾는 그가 종종 재미있었다. 넌 그렇게 안 생겨선 은근히 장난을 좋아해. 언젠가 소중한 친구가 불평 아닌 불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좋아요.”

“….”     


그가 숨을 훅 들이쉬었다.     


부드러운 재질로 촘촘히 짠 니트가 볼에 닿았다. 그야말로 파묻히듯 나는 그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어깨를 잔뜩 옹송그리니 꼭 주인의 옆구리로 파고 들어가는 어린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향수를 쓰지 않는 그의 체향과 옷 냄새가 더해져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단 향기가 났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마셨다. 들이마신 숨을 다시 내뿜고 싶지 않았다. 소파에 등을 대고 있던 그는 어찌할 것 없이 애매하게 팔을 들어 몸을 굳혔다. 그 가슴팍에 귀를 대고 일정한 박자를 들었다. 그의 박자에 나의 것도 맞추었다.     


“침대 같아요.”

“… 살이 쪄서.”

“그거 말구요.”

     

그는 가끔 웃긴다.

    

“이렇게 있으면, 너무 포근해서…. 잠도 오구….”

“시몬스네.”     


그가 투덜거리듯 읊조리면서 내 어깨를 안았다. 춥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듯, 와닿는 그의 손에 온기가 가득했다. 나보다 열이 훨씬 많은 그는 자주 차갑게 식는 내 손이 못마땅해 그의 것을 빌려주곤 하였다. 그마저 전도되는 열은 한순간뿐이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겠지.”     


감은 눈을 떴다. 고개를 살짝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

“널 내가 붙들어 둘 수는,”

“없어요.”     


끊어내는 말에 그의 눈빛이 탁해진다.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었다.     


“나도 못 하는 일인데요.”

“기어이 사라질 거니?”

“봐서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요.”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손을 풀지 않아 허리 아래로는 외려 완전히 맞닿아버렸다. 그가 미간을 좁힌다. 의도치 않게 지펴버린 불을, 나도 알고 그도 알았다. 슬쩍 다리를 움직였다. 그는 씁, 숨을 삼켰고, 나는 눈까지 휘며 웃었다.     


“생각보다 정상이 아니라니까.”

“그런 말은 말지.”

“왜? 도망가고 싶어서?”

“왜 자꾸 널 때려. 마음에 없는 말들로.”     


가끔 남자는, 얌전한 말로 표현하자면,  진중했다. 뻣뻣해 보일 정도였다.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지. 내가 피그말리온, 그는 갈라테이아 같다고. 조각상 따위가 인간의 마음을 훔쳐낸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그는 한결같다. 그럴수록 겉을 감싼 포장지를 벗겨내고 싶은 음습한 욕망을 모르고.

아, 정말 모를까?     


“몰라요? 가장 고난도의 개그는 자학개그라고요.”

“웃기지도 않아.”

“난 재미있는데.”

“사라지지 않기로. 약속하자.”     


그가 턱에 힘을 주었다. 굳은 입매가 흔들리는 눈동자와 퍽 모순되었다. 그 점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 면 정말 정상이 아닌 거겠지. 어쩌다 이런 사람이 내게 붙잡힌 걸까. 안쓰럽기도 해라. 그의 뺨에 한 손을 대었다. 그가 마주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불안해요?”

“그래.”

“하지만 미안하진 않아요.”

“상관없어.”

“내 상태는 생각보다 힘들어요.”

“차라리 내가 힘들면 좋겠다, 너 말고.”     


기어이 그의 눈이 젖어 들게 만들고 말았다. 이런 나도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 모습이 아팠다. 하지만 교활한 쾌감은 덤이었고. 달아오르는 살갗의 온도는 옵션이었다.     


“안 그래도 내 장래희망이었는데. 대가리 꽃밭.”

“나쁘지 않지.”

"… 그러길 바라는 것 같네."

"네가 괴로워 할 바에야."


… 입 맞추고 싶어.

나는 속삭였고, 그는 곧 그렇게 해주었다.          


남자는 이렇게 망가진 내 곁에 있을 거라 말한다. 자진해서, 원해서 그렇게 할 거라고. 내 푸른빛이 내가 당신마저 물들이면 어쩌지? 따위 양심적인 고민은 들지 않았다. 당연하잖아, 그는 나의 것인걸.

적어도 내가 사라지기 전까지, 어쩌면 그 이후에도, 이 품은 나의 것이다. 회색빛 또는 시퍼런 빛이던 내 삶에 그는 베이지색쯤으로 자리할 거고. 아, 핑크도 좋지. 당신 재주껏 날 붙잡아 놓으려 애쓰는 것 정도는 허락할게. 말한 적 없지만, 어쩌면 나는 너를. … 하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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