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작 Apr 25. 2022

아름다운 그대에게

재이와 도현, 그리고 연지

<1화>


마지막 잎새는 겨울 강풍이 아닌 여름 습기에 지쳐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나의 잎새는 말이다.


연지는 책상 위 보란 듯이 세워둔 탁상시계 바늘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노려보았다. 6시 5분 전. 초침이 막 12를 통과해 이제 4분 전.

오늘 저녁은 뭐로 할까.

푸드트럭과 도시락 체인점 메뉴는 종류별로 섭렵한 지 오래였고 근처에 즐비하게 자리한 음식점도 별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한 끼 식사가 이렇게나 진지하게 생각할 일일까.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 같은 고민을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긴 했다. 한편으론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 중 설령 잘못 택하더라도 딱히 유의미한 불행으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뭐랄까, 일말의 ‘적당한 주체성’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사소한 장치라고 생각하면 꽤 필요한 일과였다. 


스터디 카페는 사람이 그득해 조용한 시장통 같았다. 아무리 거칠게 밀고 끌어도 부드럽게 굴러가는 의자와 정확하게 책상 위로만 내려 꽂히는 조명. 컵 안 얼음이 달그락거리고 펜으로 종이 면을 끄적이는 소리는 존재감이 요란해도 괜찮았다. 그 정도는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이곳의 인심이다. 지난 주말, 노트북을 대동했다가 눈칫밥 실컷 먹은 젊은 직장인의 불만과 카페 사장의 난처함도 룰을 깨지는 못했다.

6시 땡. 기가 막히게 연지의 폰 화면 위로 톡 알람이 반짝였다. 셋이 모여있는 톡방에 동생이 밥 먹는 근육질 캥거루 이모티콘을 보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꽤 자주 밥때에 맞춰 도착하는 톡에 연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왠지 마음이 뜨끈해 못생긴 캥거루를 실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모티콘 옆 남은 숫자 1이 귀신같이 사라진다. 그다지 활기찬 톡방이 아닌데도 일단 누가 무슨 말이라도 하면 모두 금방 읽었다.     


‘벌써 밥 먹냐?’     


입꼬리가 슬며시 되돌아온다. 3살 터울 언니는 같은 말도 듣는 사람 기분이 묘하게, 시비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되게 하는 기이한 재주가 있다. 툭툭 던지면서 무구한 듯, 친근한 듯 그렇게. 어릴 때부터 언니의 그런 화법은 종종 불편했다.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엄마에게 몇 번인가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려보아도, 늘 되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언니 원래 그렇잖아.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겠니. 


성 빼고 부르면 안 돼? 정 없어 보여.


중학생 때 친구에게서 들은 핀잔 아닌 핀잔은 그 후에도 꽤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연지를 따라다녔다.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거라지만, 사실 연지는 아직도 그게 무슨 차이인지 뚜렷하게 알지 못하겠다. 다만 불편하지 않고 튀지 않게 구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는 건 잘 알고 있으므로, 그렇게 지구 따라 둥글게 일상을 사는 참이었다. 강아지가 고개를 숙이고 맨들한 뒤통수로 주인의 옆구리를 파고들며 애교 부리듯이. 그런 면에서 보면 자신과 언니는 확실히 달랐다. 원하는 대로 뱉고 사는 것이 그녀의 자아다. 아기자기한 폰트로 화면에 찍힌 ‘벌써’라는 말은, 마치 ‘한 것도 없으면서’란 뜻을 내포하는 듯했다. 넘겨짚지 마. 어이없어하는 언니의 말투가 들리는 듯했지만, 연지는 깔끔하게 무시해버렸다.      


언니는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폰 화면을 꺼버렸다.


해가 지기에는 터무니없이 이른 시간이라 곳곳에 켜진 치킨집 전등이 흐릿했다. 대로변을 벗어난 안쪽 거리는 연지에게 있어 그 어느 곳보다도 친밀했다. 코너와 코너 사이, 그러니까 몇 걸음 내에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와닿을 수 있는 직선은 온갖 것들이 뒤섞여 이루어졌다. 처음과 끝은 프랜차이즈 카페나 베이커리, 거리에서 터줏대감 역할을 하는 높다랗고 낡은 건물에 층수 빼곡히 들어있는 세를 일러주는 오만가지 간판들, 그리고 남은 공간에 꾸역꾸역 어떻게든 밀어 넣은 듯한 개인 음식점. 개중에는 나름 맛집으로 불릴 만한 곳도 있었다. 작은 출입문에 낮은 천장이 퍽 인상적이고 두세 테이블만 놓여 마치 미슐랭 별과 같이 ‘핫한’ 음식점의 훈장인 ‘웨이팅이 기본인 집’이라는 딱지를 기다리는 것 같은 그런 맛집 말이다. 연지는 눅눅한 것이 비단 날씨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저 거리 안으로 들어가면 오늘은 어디를 가지? 어제와 같은 걸 먹을까? 그렇게 신선해 보이지 않는 재료를 식용유와 함께 불에 버무려 흔하고 그럴싸하게 만든 뒤 짜고 매콤한 소스를 끼얹고 앞의 모든 과정을 감추어 ‘음식’이 되는 그런 것을? 내 뱃속으로 들어가면 얼마간은 덤덤하게 포만감을 유지하다가 필요한 양분으로서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잉여가 되어 익숙한 지방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그런 것을? 어제와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리에 서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위험한 생각이었다. 아, 언니가 문제다. 언니가 일단 일상으로 불쑥 들어오면 괜히 철학자 놀이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연지는 대로변으로 나와야 했다. 그녀는 언젠가 sns에서 보았던 카페를 기억하고는 지도 어플을 켜 안쪽 거리로 들어가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드럽게 열리는 카페 문은 특이하게도 양방향이다. 밖에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쇼케이스 안 디저트들은 작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직장인도 무엇도 아닌 연지가 한 끼 식사로 택하기에는 확실히 부담스러운 가격을 갖췄다. 기분 전환에 완벽하게 제격이었다.     


‘the last order – 18:00’     


널찍한 프런트에 달랑 꽂혀있는 안내를 본 연지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다크 초콜릿 케이크가 특히 맛있다고 해서 온 건데. 사악한 가격에 내심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유리 케이스 안 딱 한 조각 남은 케이크가 은근히 눈에 밟혔다. 손님도 몇 없는 내부를 괜스레 훑고는 몸을 돌렸다.


“주문하셔도 되는데.”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렸다. 낯설지 않으면서도 전형적인 젊은 카페 주인의 것 같은 목소리였다. 어쩐지 머쓱한 웃음이 나왔다. 그래, 시간이 몇 시인데 칼 같이 닫으려고.


“아…. 초콜릿 케이크 주문하려고요. 조각이요.”

“포장이세요?”

“네? 네.”


연지는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쿠폰 만들어드릴까요? 단순한 물음에도 힘차게 네,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을수록 카페 주인의 목소리가 묘하게 듣기 좋았다. 손짓과 행동이 깃털 같았다. 어쩌면 오늘 이 카페를 선택한 건 꽤 잘한 일일지도 모른다.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그래도 카페 주인은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말 더 붙여볼까? 단골이 될지도 모르잖아. 연지는 스스로가 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직감’에 따라 가격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을 만큼 이 카페도, 카페 사장도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연지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전까지는.



오랜만이다, 연지야. 그 생생한 목소리를 대체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도현은 이렇게 만난 것도 반갑다며 아예 케이크 하나를 통째로 주었다. 각기 다른 8조각이 모여 둥그런 원을 만들어낸 케이크는 짜증 나게도 너무 특별해 보였다. 연지는 손도 대지 않은 케이크를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왔다.


“웬 케이크?”

“뭐야, 누구 생일이야?”


연지는 언니와 엄마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헐, 박연지 생일이야? 에이, 설마. 엄마 쟤 생일 기억 못 하잖아. 등 뒤로 두 여자의 당황한 수군거림도 들었지만 내버려 두었다. 참, 이럴 때만 내 눈치를 보지. 방문을 닫은 연지는 손안에 든 작은 종잇조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언제 밥이나 같이 먹자. 너도 이 근처인 줄 알았으면 진작 보는 건데.


 도현은 연지의 카드를 받는 대신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근처라는 것은 직장을 말한 것일 테다. 연지는 얼떨결에 도현의 명함을 받으면서 그녀의 오해를 어렴풋하게 이해했다. 흰 티와 검정 슬랙스 차림은 확실히 스타트업 회사에 다니는 젊고 바쁜, 유능한 직장인처럼 보일 것이다. 놀랐다면서 놀란 사람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지도, 목소리도 높이지도 않고 미소를 짓는 도현에게 연지는 어색하게 웃어주었다. 웅얼거림은 꾹 삼키고서.


도현아, 이거 괜찮아?

도현아, 내가 해줄까?

도현아. 도현아. 도현아.


열여덟. 어린 박연지가 성도현에게 밥 먹듯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도현아. 그때 박연지는 뭐가 그렇게 좋아서 그 아이의 이름을 줄기차게 불러댔는지 모를 일이다. 스물여덟 성도현이 짓는 미소는 십 년 전만 해도 존재할 수 없었다. … 그때 성도현은, 어땠더라.

연지는 10년 만에 다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생각보다 반갑지 않았다. 열여덟, 조금 아팠던 그해를 함께 보냈던 두 사람은 특히나 그러했다.

서랍의 맨 마지막 칸을 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열지 않았는지, 작은 박스가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고통스럽게 끌렸다. 서랍 안은 온갖 잡동사니가 정리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다. 연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래를 뒤적거렸다. 그녀의 손에 작은 지갑이 걸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시 망설이던 연지가 지갑을 열었다. 똑딱, 소리를 내며 열린 지갑 속에는 여고 교복을 입은 세 학생이 찍힌 사진이 들어있었다. 연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일 때 우린, 두려운 것이 없었다.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는 어느 조폭 영화의 명대사를 유행어처럼 떠들고 다녔던 아이들.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무슨 조합인지 모르겠다며 신기하게 여겼던 트리오. 세 소녀가 먼지 덮인 옛날 사진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 그래서 야자 쉬는 시간에 뭐 튼다고? 아, 너네 어제 했잖아! 오늘은 우리 차례다~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고 모두가 좋아했던 유재이.


- … 난 됐어. 담임쌤이 불러서.


조용하고 나서는 법이 없던, 하지만 존재감만큼은 확실했던 얼음공주, 성도현.


- 재이야! 도현아! 시험 끝나고 우리 뭐 할까?


… 그리고 언제나 두 사람의 곁에 있었던, 평범한 박연지.


유재이, 성도현, 박연지는 언제나 함께였다. 

그래, 그땐 그랬다.


 



작가의 이전글 네게 왔던 날, 비 오던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