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
어느 날 아침 평소와 똑같이 잠을 깬 그레고르는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걸 깨닫는다.
이런 변신에 대한 걱정보다 가장인 처지에 당장 돈을 벌러 나가지 못함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동안 가족들은 전적으로 그레고르가 벌어서 살고 있었는데 이제 가장인 그레고르가 직장에 나가지 않자 그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던 부모는 밥벌이에 나서고 여동생은 그레고르의 바람대로 음악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어느 날 여동생의 연주 소리에 궁금해진 그레고르는 가족들을 보려고 방 밖을 나왔다가 하숙생들에게 들키고 아버지가 던진 사과 조각이 살에 박히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결국 죽고 만다
가족들은 그가 죽자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끼고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난다. 이제 그들 곁에는 그레고르 대신 예쁘고 건강한 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들 앞의 미래는 새롭게 시작할 거라 기대한다.
변신의 주인공을 벌레로 표현한 것은 카프카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벌레 Ungeziefer라는 표현은
카프카의 부친이 아들인 카프카를 부르는 표현이다. 아버지는 아들에 성향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남자답지 못하다며 하찮은 벌레로 불렀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거대한 심판관 같은 대단한 존재였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에 전형적인 자기애가 충만한 나르시시스트였다.
카프카는 자라면서 동부 유대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공동체와 사랑 예술의 존재를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과 다른 사고체계로 자란 서부 유대인이었던 그는 공동체와 사랑이란 개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정체성의 혼란과 아버지의 바람대로 자신과 다른 삶을 살며 힘들어한다.
그의 고백이 말해준다.
"나에게는 평온이 1초도 없었고, 아무 것도 주어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을 노력해서 얻어야 했다."
아버지란 존재는 무엇인가! 아버지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말한다. 세상에 나가 얻는 돈, 명예, 목표. 성취, 타인의 인정을 말한다. 그게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믿는 사람이 그의 아버지다.
그는 아버지의 요구대로 애써왔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흡족한 아들이 아니었다.
아버지 말대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작가는 자신을 소설 속에서 벌레로 빗대어 세상 사람들에게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나란 누구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존재함으로 가치 있는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만족을 주는 쓸모 있는 도구가 되어야만 존재 가치가 있는가?
이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현대 물질주의와 인간을 향한 실존주의 측면, 생명에 대한 종교적 관점 등 다양하게 해설이 나뉜다.
사람들은 번뇌한다.
카프카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갑자기
겪게 되거나 의도치 않게 벌어지는 상황마다 방황을 하고 혼란에 빠지는데 알고 보면 인간의 예측불가한 불영속성, 유한성과 근원적인 실존 문제에 있다.
소설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그레고르가 아니라
그의 가족이다.
처음에 그레고르의 가족은 머리로는
"그동안 그레고르가 우리에게 해준 게 있는데 벌레가 되었더라도 은혜를 갚는 게 도리야.
그래도 가족인데 우리가 돌봐야지." 하며 그레고르를 챙기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 마음에는 혐오가 자리 잡고 만다.
마주 보기에도 끔찍한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저것은 그레고르라 할 수 없어.
이젠 아무 도움이 안돼,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
이런 무의식이 자리 잡게 된다.
"변신"은 소름 끼칠 정도로 현실적인 문학이다.
그의 가족들은 역겨움과 고통을 눌러가며 가족으로서 도리를 다하려 애쓴다. 이렇게 마음과 생각이 불일치하니 자꾸 오류를 일으킨다. 싸함과 미묘함, 혐오감이 오류의 결과다.
그들이 무의식을 억누르고 스스로를 속여가며 버티자 그들의 이상한 행동이 잦아진다. 그레고르의 방은 점점 더러워지고 먹거리도 엉망으로 되며 때로 굶기도 하며 방치된다.
자기 혼자 오빠를 돌보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던 여동생은 무의식적으로는 벌레를 돌보지 않을 핑계를 찾고 있다가 엄마가 방을 청소하자 대성통곡을 하며 다신 방을 청소하지 않겠다고 외친다.
여기서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인간을 다섯 가지 종류의 유형으로 나눈 가운데 수동적 인간 유형으로서 해석해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하니까 마땅히 따라야 하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행하지만 납득도 안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의 행동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무의식적 자아를 억압하는 거다. 참고 참으면 언젠가는 터져버리고 만다. 실존적 위기, 부조리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된다.
여동생은 예전의 자상한 오빠라면 가족들의 고통을 모른 체 하지 않았을 것이며 스스로 집을 나가 버렸을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자신들이 없앤다고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거란 말까지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오 년 동안 한결같이 성실했던 그레고르의 존재감에 감사하지도 않았다.
그저 당연하게 여겨왔을 뿐이었다.
아주 잠시 짧은 동안만 안타까워했다.
자신들의 생계에 대한 걱정이 앞섰고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했다.
이 상황을 벗어날 일만 따지고 역할 대체물을 찾으려 한다.
그런 마음은 나중에 그레고르가 죽자 겉으로는 울지만 진심은 오랜만에 평온과 휴식을 얻게 되고 핑곗거리 삼아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족여행을 떠남에서 나타난다.
치매이셨던 어머니가 병원 중환자실에서 상태가 호전됨을 감사했지만 이젠 콧줄로 연명하시게 되어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지자 집으로 퇴원하지 못했다.
여러 요양병원을 알아보고 방문 상담 끝에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데로 정했지만 자식으로서는
탐탁지 않았다.
국가인정 1등급 시설임에도 실제로 이용해 보니 처치나 운영은 외관에 비할 수 없었다. 병실 두 곳을 한 분의 외국인 요양보호사가 돌봤다. 보호자가 매일 오는 걸 싫어하기도 했고 알아서 하니 자주 오지 말라고 걱정하는 보호자를 나무랐다.
대다수가 치매 어르신인 노인 환자들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눕혀 링거를 맞으며 잠자고 계셨다.
어머니는 두 달을 입원해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노인 침대마다 꼼꼼히 커튼을 치고 완벽하게
가려져 있었다.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다. 그저 프라이버시를 위해 할머니들이 커튼으로 가리고 계신 줄 알았다.
어느 날 환기 시간대와 겹쳐진 면회시간에 난 그 이유를 알고 충격을 받았다. 커튼이 젖혀진 상태에 여섯 분이 모두 똑같았다.
아직 4월이라 조금 쌀쌀함에도 할머니들의 모습은 갓 태어난 아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벌가 벗겨져 기저귀만 채우고 웃옷도 입히지도 않은 채 상체 위에 덮어만 놓은 상태였다.
혹시 욕창이 생길까 싶어 몸에 체온이 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옷을 입히지 않았다. 기저귀도 갈기 쉽게 바지도 입히지 않은 채였다. 추운지 더운지 아픈지 불편한지 표현도 못하시는 듯 보였다.
그저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내시기도 하셨고 자는지 깨어 있는지 알 수 없이 눈을 감고 계시기도 했다.
정해진 날 순차적으로 목욕을 마치고 자신의 침대에 눕혀질 때 남자 간호사는 흡사 마네킹(짐짝)을 옮기듯 참대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아무 힘도 못쓰는 노인 치매환자는 몸이 늘어져 있는 상태라 아무리 작은 체구라도 무게가 상당하다. 설사 거구의 남자 간호사라도 살며시 내려놓으면 좋겠으나 그러다가는 그가 허리를 다치게 되고 아니 이미 허리가 안 좋아진 상태일지도 모른다.
보호자들은 시트만 덮고 있는 환자가 아직 살아계심만 확인하고 보고 갈 뿐 아무도 제대로 살필뿐 지적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게 치매 말년의 병상 상황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안타까운 어머니보다 어쩌면 내일의 내 모습이
되어 보이기까지 해서 슬펐다.
더구나 환자가 모른다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며 이게 보호자와 환자에게 최선이라면?
그런 상황이 되면 소설의 그레고르의 벌레와 다를게 뭐가 있나 싶다.
아니 적어도 자신이 벌레로 변한걸 인지를 하고 있는 그레고르가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차라리 모르는게 나을까!
설사 괴물까지 아니더라도 사람이 저런 상태로 생명이 꺼져가기를 기다리며 알 수 없는 약물에 취해 최대한 임종의 시간을 늘리려고 온갖 처치에 놓이고 방치도 방조도 그 어느 쪽도 할 수 없는 보호자의 마음은 어떠할지 겪어봐도 아직도 모르겠다.
고통스럽게 숨이 꺼져가길 기다리는 게 너무도 비참하고 충격적인 현실이었다.
인간의 마지막이 저렇게 가는 거구나!
스스로 아무 의식도 없이 죽어가는구나!
자식들마저 어찌할 수 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고 마지막을 맞이하는 게 맞을까 싶다.
이 글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탄생이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었듯이 죽음도
인간이 관여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라 한다.
신이 불러주실 때에 이르러 자연순리에 맡겨야 함이 옳은 일인데 생각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