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작은 허물이 더 큰 죄가 되다

by 페이지 성희



법정스님의 유서(생의 백서)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일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라도 첨부되어야 하겠지만

제 명대로 살만치

살다가는 사람에겐

그 설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므로

유서에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중독과

그리고 원한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나를 쓸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걸음 한걸음

죽어 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를지라도

"네"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서는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 같은 걸 남길만한

처지가 못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흔히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서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도 역시 타인이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혼자서 왔고

갈 때도 나 혼자 갈 수밖에 없다.

내 그림자만 이끌고

삶의 지평을 휘적휘적 걸어왔고

또 그렇게 걸어갈 테니

부를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왕래를 하며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 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더 이상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보랏빛 노을 같은 감성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뇌를 뚫고 환희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의 음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의 인간의 선의지 이것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돤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른 것은

오로지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저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해서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괴의 눈이 멀고

작을 때에만 기억이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그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하나가 없고 말을 더듬는 장애자였다.
대여섯 된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리고 있었다.
돈은 서너 가락치밖에 내지 않았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장한 엿장수였다면

벌써 그런 일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자라는 점에서

지워지지 않은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쫓고 있다.


이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이런 후회스러운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샤드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본래 무일불은 우리 사문의 소유관념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 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나는 간단명료한 것을

따르고자 한다.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에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고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버린 헌 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 데서나 다비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로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수행자가 되어

금생에 못다 한 일을 하고 싶다.



모든 존재는 본래 부처의 성품(불성)을 갖추고 있으며 따로 부처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의 평등성과 자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독신으로 사는 친구의 어머니가

작년 봄에 소천하셨다.

친구는 몇달을 앓고나서 겨우 기력을 회복했다.

유산을 물려 받고났더니 이런 생각을 했다고

자신이 죽으면 내게 일부분을 남기고 싶다 다.

그냥 지나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얼마 공증에 필요한 서류를 보내달라고 한다.

어이가 없고. 화도 났다.

아직 살 날이 많은 나이에 왜 죽음부터 생각을 하니?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자!

누가 먼저 갈지 어찌 안다고!

서류는 보내지도 않았지만 보내기도 싫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남겨주신 거 잘 쓰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시게 잘 살 생각이나

하라고 했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에 혼자 남아

벌써 죽음 전후를 준비하는 친구가

그저 안타깝고 안쓰럽기만 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