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실행
신고
라이킷
22
댓글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페이지 성희
Nov 15. 2024
이야기로 남은 여고시절
시내 중심가 학교에 다녔던 여고시절의 문화체험
중학교 3학년이 저물어 가는 때
보통의 여학생들은 바람이 있었다.
평범한 동네
학교
가 아닌
진명, 숙명,
이화,
배화
같은 이름만으로
역사 깊은 여고에 가고
싶은
꿈이
있
었
다.
그런 학교는 시내의
사대문 안에 자리했다.
공동학군을
지원해
넣어
야 갈 수
있기에
.
부푼 기대감으로
넣었지만 뺑뺑이 운이 부족했는지 차라리 평준화전이었다면 시험이라도 보고 했을텐데
지금은 북촌마을이라 불리는
곳의
한
여고에 배정되었다
우리 학교 정문
추운데도 발을 동동 떨며
난생처음으로
밤
마다 달님에게
절도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바랐
지만
마음
속 학교가 아니었다.
세상
일이란 게
바란다고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처음 알았다.
종로서적 같은 대형서점과 미술관이나 학원가가 많은 중심가로
등교를
하는
매일이
특별한 나들이 같아서
낯설고 시큰둥했던
학년 초와 달리
보이는 것이
신기하고
설레는
나날이 늘었
다.
종로 거리 번화했다.
만남의 장소 종로서적
다만 아침마다 버스 타기가 고역이었다.
등교하는 버스는 일명
황금노선만
돌아다녔다.
버스로 혜택을 보는 건
학생들이 낸
회수권을 세며
배 두들기며
부자가
된
사장뿐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시내에 있는 온갖
학교란
학교를
다 거치며
돌아다니는 무늬만
시내버스인 스쿨버스였다.
탈 때부터
차 안은
이미
학생들로
콩나물시루였다.
버스에서 내리면 단추
한 두 개
떨어지는 건
예사이고
가방도 놓쳐서
창밖으로 던져주는 일도 있었다.
정성 들여
다려
입은 교복은
구겨지고
몰골은
엉망이 되었다.
겨울엔
타인의
체온들로
훈훈했지만
여름엔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찜통이었
다.
심지어 학생들을
차
안에
들이밀던
차장언니가
한 명이라도
더 태우려고
하
다가
자신은
아슬아슬하게
한 발만 올린 채
매달려 가기도
했다
.
그래도 신기하게
학생이
떨어졌다는
뉴스는
없었고
다들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며 다녔
다.
더 이상 태우지 못하는 차속으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간
학생들은 이쑤시개처럼
붙어 서서
고문 같은 시간을 참았고,
자신의
학교
정류장
에
도착하면
미꾸라지처럼
공포의 버스에서 탈출했다.
70년대 만원버스
매일 아침
이런
차를 어린 학생들이
타고
다녀도
,
아는지 모른 지
부모나
어른들은
살펴볼
여력이
없었다.
학교라도
다닐
형편이면
감사해야
한다 했고
고생도 삶에 보탬이
된다고
나무랐다.
그땐 그랬다.
다들 바쁘고 부지런히
뛰어다녀도
간신히
먹고살기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누군가 얘기해도
귀 기울여 듣는 이도 없었
다.
2학년이
되자
요령이
생겨
번거롭지만
일부러
전철을
타고 종각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었다.
시간이
더 걸려도
고생도 줄고
학교 가기가
한결
수월했다.
고풍스러운
아담한
학교에
들어서면
일제강점기 학교를 연상하는
구관과
시멘트로 네모나게
멋없이
지은
신관이
나란히
나누어져
있었다
.
구관은
3학년과 야간생들
이 쓰고
신관은
1,
2학년
교실이
있었다.
신관에는
계단이
없었다.
평평
하게 경사진
복도를
만들어
오르고
내리
게
만들었
다.
체육수업이 있는 날은
체육복
바지
덕분에
평소에 답답했던
타이트 교복 치마에서
탈출하듯
반 전체가
마치
약속이
라도 한 듯
우당탕
거리며
요란스레 달려
내려왔다.
그런 날은
1층에 있는
교무실에
계셨던
션생님들이
뛰어나오셨다.
천둥
번개가
치는
줄
알았다고
놀라서
눈을
쟁반만
하게
뜨고
우리를 야단치셨지만
우리는
넘치는 자유를 포기하지 못했고
우이독경
잠시 멈춤 식으로
그때뿐이었다.
언제나
더 크게 발을 구르며
신이 나서
달려 내려왔다.
교무실이 없었어도
걸어
내려오기에
아쉬운
내리막
놀이길이
라
장난치며
뛰어다녔지만
신기하게 아무도
넘어지거
나
구르는 아이는 없었다.
구관
앞
마당엔
고목이 된 고무나무가
여러 그루가 있어 넓은 그늘을 내려 주었다.
여름엔 친구들과 그늘아래
앉아
나뭇잎이
바람에 속살대는 소리를 들었
다. 중심가
학교만
의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그 당시에도 애들은
아침을 먹고
오지 않았다.
아침마다 용돈이 넉넉한 친구들이 로터리에 있는
빵집에서 갓 구운 식빵을 사 와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었다.
빵집 주인은 등교 시간에 맞추어
식빵을 삼등분해서
한 덩어리씩
소분해서
팔았는데
190원쯤 했다.
학생이 사면
10원을
깎아 주
었다.
아침마다
나눠 먹는
재미로
고된 등교를 위로받고
사춘기의
출출한 배를
채웠다.
현재 송현공원에서 바라 본 안국동 학교 부근 예전 건물이 그대로다
2학년에 올라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오니
한 반이어도 몰랐던
친구들을
알게 되고
서로
서로
친하
게 되었다.
그중에서 한 친구와
평생
절친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중성 느낌이 나는 외자
이름을 갖고 있었기에
왠지
특별하고
멋져
보였
다.
교복을 입은 경주 수학여행 사진
구관 앞에서 초여름 춘추복을 입은 모습
나는 동생이 셋이나 있고 장녀인데
친구는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외동딸이었다.
감히
어렵기만 한
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그 당시엔 드문
딸바보인 아버지와 친구처럼
다정했
다.
해맑고 애교도
넘쳤다.
차분하
고 내성적인
나와
성격이
정
반대였다
.
대학도
문과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영문과나
교대
가
아닌 작곡과로
정한 것도 신기했고
무엇보다
처음 보는
낯선
이와
거리낌 없이
말도 잘 나누었다.
그 시절에는
여자애들이
낯선 남자에게
함부로
말을 건넨다는 게
쉬운 게
아니었다. 위험하다
배웠다.
그때는
지금보다
여자애들에게
금기사항이 많았다.
아니
,
하지 마라.
가지 마라.
모든 하라가 아니라 마라다.
커갈수록
세상이 위험하다는 걸
어릴 때부터
세뇌를 받으며 자랐다.
그 애는
활달하고 거침이
없었고
사교성과
붙임성이 뛰어났다.
사촌 오빠가 다니는
안암동에 있는
대학교에서
여름방학에
여는
영어 특강도
들으
러 다녔
다.
그 애의
강압
(?)
어린
제안으로
나도
따라가
강의를
들었다
.
둘이서
땋았던
머리를
풀고
여대생처럼
사복을 입고 강의실에 앉아 있으니
앳된
신입생처럼 보였
다.
친구 따라 강남 가기보다 더 신나는
친구 덕에 나발을 분 격이 되었다.
엉뚱하고 하고픈 거 뭐든 하는
아이와 어울리다 보니
나도 성격이 활발해져
갔고
세상에 대한 경계심도 줄어갔
다.
그
친구
따라서
음악감상실이란 데도
처음 가보았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종로 1가 르네상스 음악 감상실에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애는 녹음을 부탁했다.
얼핏 봐도
안에 있는
손님들
은
주로
대학생이나 성인
들이고
늘
고등학생은 우리뿐이었다.
컴컴한 공간 안에 음료수 한잔을 손에 쥐고 홀짝이며
길고 생소한 음악을
들으며
푹신한 소파에 처박혀 있는
여고생들의 모습은 보는 이나 듣는 이나 낯설었을 것이다.
르네상스 간판
1951년~1987년
사실 나는 음악보다 미술감상을 좋아했다.
하교하며
종각까지 이어진
길을
걸으며
종종
미술관 순례를 했다.
서울 미술관, 시립 미술관이 있었다.
주로 무료입장이었고, 가끔 화가도 볼 수 있어서 신기했다.
무엇보다
그림에서 풍기는
독특한
안료 냄새가
이국의
향기 같아
좋았
다.
그 재미로 매연과 복잡한 도심에서
위안을 받았다.
학교 부근에는 비원이
있었다
.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부모, 조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커왔기에
우리는
그들을
"족발이" 라며 눈살을
찌푸리고
지나쳤
다.
근처에 창덕궁 같은 고궁이 있었는데도 언제나 소풍은 차를 타고
먼 왕릉으로 갔었다.
비원
학교
뒤편에는
예전 경기고
자리
였던
정독 도서관이
있었다
.
토요일에는
그곳에서
종종
친구들과 어울려서
공부했다.
평일에는
오랫동안
시험을 준비하는
일반인이나 대학생이
많아서
자리가 나지 않기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토요일
오후는
그들도
피 끓는 청춘인지라
데이트를 한다고
오후에는
퇴실을 해서
빈자리가 생겼다.
오래된
고성처럼
아름답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어찌 보
면
도서관이
아니라
정원이 메인 핫플레스였다.
정원사가 따로 있나 싶을 정도로
철마다 꽃도 아름답게
심어
가꾸어 놓고
나무도 범상치 않은 자태를 지녔다.
도서관이기에
놀러 온 곳이
아니니
말도 행동도
정숙해야
했다.
정원을
돌아다닌다는
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돌아다니는 학생이 보이면 관리 아저씨가 호루라기를 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고
쫓았다.
정원은
아쉬운 눈으로
작은
창을
통해서
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박물관이나 궁궐같이
아름다운 장소는
공부에 방해가 되었다.
이곳이 그랬다.
책을 보는
시선에
몰두해야
하는데
자꾸만
집중하는 게 쉽지 않았
다.
마치 파티에
입고
갈
요란한
드레스를 입고 청소를 하거나
공부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비 오거나 흐린 날에는
고즈넉하고
차분함이 지나쳐
센치멘탈 한
감상에 젖게
했다
.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머나먼 그곳
이었다
자주
가
지 않았다.
정독 도서관
학교 가는 돌담길
여고 시절 이야기를 쓰다 보니
막연히 학원 다니고
학교
에서 공부한 거밖에
쓸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우아하게
문화생활을 했었나 싶다.
돌이켜 보니
시내
중심가 있는
학교에
다니며
그 시절 다른 지역 학생들보다
문화 혜택을 많이 받았던 거 같다.
특별한 오락도 여가도
누리지
못한 시절이어도
나름 알찬 학창 시절을
보냈던 거 같
다.
또 한 가지 뭐든 하지 마라
가지 마라 했어도
허락받지 않고서
음악 감상실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강의도 듣고 했기에
추억도
한 보따리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
다.
- 사진자료를 찾다보니 학교가 104년이
된 명문 여고라는걸 새삼스레 깨달음^^-
keyword
도서관
학교
문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