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1973 가을, 이사

하숙집

by Engineer

언니가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간 사이 유라는 이사를 가기로 했다. 어차피 언니도 여행에서 돌아오면 형부의 집으로 이살 갈 것이라고 했다. 이사 갈 집은 학교 친구의 도움으로 쉽게 구해 계약까지 마친 상태였다.

짐이라고는 옷가지와 미술 도구, 간단한 살림용품 뿐이어서 내차로 한번 움직이면 되었다. 주유소 비품용

빈 박스 몇 개를 준비해 유라의 아파트로 갔다. 유라를 만나러 여러 번 아파트 건물에 왔었지만 한 번도

유라가 사는 아파트에는 들어 가 본적이 없었다. 유라 형부도 언니와 결혼 약속을 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아파트 안까지 들어가지 못했었다고 했다. 그만큼 유라 언니는 지극히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분이셨다. 물론 아직도 나를 유라의 상대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고 했다.


유라의 아파트는 7층에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방문이었는데 괜시리

가슴이 설레었다. 더 이상 유라 언니의 싸늘한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실상은

언니의 결혼식 준비에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유라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나도 시간을 내 유라의 운전수

노릇을 했다. 덕분에 유라 언니를 잠간씩 볼 수 있었는데 나를 보는 눈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 했다. 나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지 아니면 자신의 결혼식에 몰두하는라 신경을 못 쓴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결혼식을 끝내고 이틀 만에 본 유라의 얼굴이 조금은 지쳐 보였다. 앞으로는 혼자 살아야 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유라에게 혼자가 아니고 내가 항상 옆에 있을 거란 말을 해주며 그녀를 다독였다.

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간이 지나면 괜찬아 질 거라며 오히려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어 유라씨, 저 가방 한국에서 올 때 가지고 온 거 같은데….

거실에 어린애도 들어갈 만한 커다란 가방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캐나다로 이민 올 때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오는 3단 이민 가방이었다. 당시엔 비행기 승객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였는지 모르겠으나 승객

한 명당 저렇게 큰 가방을 두개씩이나 허용했었다. 가방을 3층으로 나누어 제작했고 가방을 꽉 채워 넣어야 똑바로 서있게 만들었다. 나를 제외한 온 식구가 캐나다로 떠날 때 저렇게 큰 가방을 5개나 가지고 가는

바람에 짐차까지 불러 공항으로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라가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방안에는 책상, 의자, 미술도구, 이젤, 미술에 관한 책들, 등등이 아직

널려있었다. 들고 온 4개의 박스에 이 모든 것을 꽉꽉 채워 방안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다. 책상과 의자는

다행이 이동이 손쉬운 접이식이라 부피가 크지 않았다. 유라가 방과 거실 청소를 하는 동안 나는 모든 짐을

자동차에 실었다. 이민 가방이 워낙 커서 자동차 트렁크에 넣었더니 더 이상 공간이 없었다. 박스와 책상

의자들을 뒷자리에 실느라고 지체하는 동안 유라가 아파트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라가 잠시

뒤돌아 아파트 위를 쳐다보다가 머리를 흔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마치 어떤 감정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괜찬아요 유라씨? 내가 유라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네, 그냥 가슴이 조금 아리네요..

그동안 언니를 많이 의지했었는데, 막상 혼자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잠시 막막했어요.

걱정 말아요 유라씨. 우린 언제나 함께 할 거고……

이제부턴 제가 유라씨 지킬거에요..

유라가 따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저의 맹세에요. 내가 그녀의 얼굴에 살짝 입술을 갖다대었다. 유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나갔다.

유라가 얻은 하숙집은 유라의 학교에서 멀지 않은 유태인마켓 근처에 있었다. 그녀가 살던 제임스타운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토론토의 올드 타운 이었다. 유태인 마켓은 폴치기스 마켓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유태인들과 포르투컬 인들이 모여서 재래시장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의 재래시장과 유사하게 각종

먹거리들이 즐비하고 야채, 과일, 육류들이 야외 간이건물이나 노점상들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유라의

하숙집은 결혼한 지 3년차인 젊은 이탤리언 커플의 집이었다. 남편의 이름은 지노 아내는 마리아였다.

그 둘은 캐나다에 이민 온 지 5년밖에 안되었지만 둘이 열심히 일해 결혼도 하고 집까지 장만한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집은 걸어서 20분 거리 안에 토론토 대학을 비롯해 대학이 2개나 더 있고 근처에

재래시장까지 학생들이 하숙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부부는 2층 주택을 구입해 하숙방 4개를 만들어 1층에서는 자신들이 살고 2층은 모두 하숙을 치고 있었다. 유라를 좋게 보았는지 유라의 방에는 따로 작은 세면대까지 설치해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짐을 풀어 정리하고 장도 보고 요기도 할 겸 시장으로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장사하는 정육점에는 커다란 고기 덩어리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과일 야채들이 괴짝 위 상자에 수북이 담긴 채로 길 따라 진열되어 있었다. 닭장 안에는 닭들이 시끄러웠고 토끼들도 보였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한국의 재래시장과 다를 바 없어 마치 고향에 있는듯 한 느낌이 드는 친근한 장소였다. 과일 가게 옆으로 처음 보는 간판이 하나 눈에 뜨였다. 패티킹이란 가게 이름 뒤에 “자마이칸 패티” 라는

문구가 있었다. 자마이칸 패티는 내가 사는 아파트 아래층의 자마이칸 두 형제한테 귀가 달토록 들은

음식이었다. 그렇게 맛이 좋다고. 유라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입구부터

맛있게 매콤한 냄새가 났다. 카운터에는 의외로 중국인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캐쉬를 보고 있었다. 키친과

카운터를 오가며 연신 새로 구운 패티를 나르는 사람들이 모두 중국인이었다. 몇 마디의 대화 후에 그들은

모두 자마이카에서 태어나 살다 온 자마이칸 중국인들임을(1) 알았다. 따끈한 패티 몇 개 사 유라와 함께

먹었다. 반달형의 커다란 만두같이 생긴 패티를 한입 베어 물자 맛있게 매콤한 육즙이 흘러 나왔다. 유라와

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와 너무 맛있다 라는 표정을 지었다. 문득 이 행복을 끝까지 지킬 거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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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구글 캐나다

(1) 19세기 초 중부터 영국은 캐러비언 섬들에 대형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농장 시초부터 흑인 노예들을 일꾼으로 부렸으나 미국 남북 전쟁 후 노예 해방이 선언되고 대부분의 흑인들이 떠나자 중국과

인도에서 일꾼들을 대거 모집하여 캐러비언으로 데리고 왔다. 자연스레 인도의 카레, 영국의 페스트리,

아프리카, 캐러비언 향신료 등의 합작품인 자마이칸 패티가 생겼고, 장사에 능한 중국인들이 자마이칸 패티를 만들어 팔기 시작 했고 지끔 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 토론토에서 가장 핫한 자마이칸 패티

가게는 리틀 자마이카인 에그린톤과 오크우드 교차로에 있는 랜디스라는 베이커리이다. 현금 온리..

1960년대 말 자마이카에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고 장사로 돈을 많이 번 자마이카 중국인들은 자마이카를

떠나야 했고 상당수가 캐나다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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