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증 받은 날 : 2025년 05월 23일
2024년 12월 06일 난 갑상선암 다빈치 로봇 수술을 했고, 어머니께서도 건강이 안 좋았다. 자격증을 받고 약 한 달가량 집에서 지내면서, 어머니와 함께 장도 보고, 병원도 가고, 칠순 생일도 챙겨드리고 하니, 전혀 그런 증세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땐 우리 집 내력에 아무도 없는 갑상선암이란 걸 겪고 많이 힘드셨나 보다. 하지만 2025년 2월 10일 즈음엔 수술 후 보험의 소중함을 알 듯 어머니 미래를 알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해 집에서 가장 가까운 "부곡요양보호사교육원"에 등록을 했다.
주위에 물어보니, 다들 실습이 어려워 코로나 때 영상으로 실습이 대체되어 대부분 코로나 때 습득했다 했다. 아프시니 내가 배워 어머니께 해드려야 하니, 난 힘든 실습이 있는 것이 낫다 생각해서 앞뒤 재지도 않고 바로 수강을 했다. 2025년 2월 10일부터 시작된 교육은 이론과 실습 후 시험을 치른 다음 건강검진까지 약 4개월이 소요되었으며, 자격증을 받은 날은 대부분 힘든 과정을 이겨낸 자신에게 주는 선물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자격증을 따면서, 알지 못했던 부분을 인지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부분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나에게 자격증 1개가 아닌 많은 선물들로 나의 인생을 풍요롭게 했다. 만약 시간과 재력이 된다면, 남녀노소 누구든 근처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획득하기를 추천드리고 싶다.
많은 선물들 중 3가지 선물 보따리만 우선 풀어볼까 한다. 한꺼번에 많은 선물들을 다 풀어헤치면 우리는 선물의 소중함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계속 글을 쓴다면 언젠가는 이 선물들을 모두 보여드릴 기회가 올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속의 모든 선물들을 보여주기는 솔직히 싫다. 선물이란 것이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글을 읽을 분들에게 실용적이고 가슴에 새길 수 있는 선물들 3개만 우선 보여드릴 생각이다.
첫 째, 이론을 배우면서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이다. 하루 24시간을 사는 우리 인간은 탄생이 있고 마지막은 죽음을 맞이한다. 진시황처럼 불로초를 먹고 영생을 누린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듯 영생을 얻으려는 노력은 어디선가 계속되리라고 생각되지만, 주변에 보면 다들 태어나 죽는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등 다 돌아가셨다. 이 과정에서 요양보호사는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다. 사람들은 죽음으로 갈수록 점점 걷지도 서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싸지도 못해 손가락으로 똥구멍에서 똥을 파줘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지 능력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는 사실도 자신은 알지도 못한다. 이것이 나의 가족들과 주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숨을 쉬고 있고, 우리는 효도라는 비명아래 돌본다. 아마 인지한 부모는 당장 죽고 싶을 정도로 비참할 것이다. 이것이 치매다.
요즘 치매가 암보다 무섭다고 한다. 선생님들의 가르침 속에서 치매에 걸린 분들의 영상을 보았다. 50살도 채 되지 않은 아내가 치매로 거동은 물론 미음 같은 음식을 떠 먹여야 하고 운동을 위해 움직임도 인지가 안 되는 아내를 위해 기계로 운동을 시켰다. 남편과 아들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남편은 결혼식 때 사진을 보면, 내일이라도 건강을 되찾아 깨어날 것 같다고 한다. 또한 아내는 유명한 서예가였다. 예기치 않은 착한 치매로 5-6살 정도의 인지를 하며 남편을 남편으로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사랑받기 위해 노래도 하고 칭찬받기 위해 어려워하며 글을 읽는다. 예전의 명석한 서예가는 찾아볼 수 없는 슬픔이 보인다. 남편은 치매라는 병도 약이 개발된다지만, 초기 치매는 나을 수 있으나 아내처럼 깊게 병이 든 경우는 힘들지 않을까 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영상은 잠시 일하러 갔다가 점심을 챙겨주기 위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남편 이야기다. 아내는 중증 치매이지만 남편을 잘 따른다. 집에 있지도 않은 뱀이 있다 해 남편은 붕산을 사서 뿌리고, 같은 음식 올려준다고 혼자 먹겠다 짜증을 내면 미안하다며 놨다가 다시 살짝 올려준다. 기를 살려 주니, 건강이 더는 악화되지는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아프실 어머니를 위한 응급처치 방법을 배웠다.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한 시간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교육원에 오셨던 두 남자다. 한 22명 정도 되는 다양한 분들이 와서 교육을 들었다. 소속도 다르고, 살아온 경험도 다르고, 생긴 것은 당연히 다 다르고, 마치 성별도 다른 것처럼 느꼈을 정도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획득하고자 하는 목표 외에는 정말 천차만별 다른 사람들이었다. 22명 중 10%가 안 되는 두 분의 남성분이 계셨다. 두 분 중 한 분은 나보다 나이가 어렸고, 한 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77세 오빠였다. 어린 분은 어머니께서 신체는 활동가능하시나 치매가 와서 돌보고 있는 중이어서 이 자격증을 딴다 했다. 77세 오빠는 아내가 다리가 불편한 소아마비 3급 장애인이시며 거동이 불편하여 오빠가 자격증을 딴다고 하셨다.
요즘 아들 보다 딸이 낫다 한다. 아들은 돈을 벌기 위해 직장 다니느라 부모를 돌볼 수가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난 교육원에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관두고 그동안 저축한 돈을 써서 건강을 되찾아 줄 아들 효자를 보았다. 남자는 어머니께서 주무시는 걸 보고 난 후 소주를 한 병 혼자 마신다고 했다. 그 남자는 40대 총각이다. 현재 직장도 없다. 번 돈은 점점 고갈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난 병든 어머니를 모시는 보석같이 아름다운 이 남자를 만났고, 실습 때 녹색옷을 입은 웃음치료사를 "시뻘건 옷을 입었네!"라고 하시는 이 남자의 어머니를 만났다. 여러분이 남성이라면 돈과 명예를 버리고 어머니를 택할 수 있을까요? 난 현재 이 남자가 어렵지만 이겨낼 것이고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믿는다.
두 남성은 이론 수업 때 나와는 별 친분이 없었다. 77세의 오빠는 애광원 4층에서 나와 함께 실습을 하면서 친분을 쌓았고, 오늘도 카톡을 주고받는 사이다. 오빠는 수업 때 항상 자신의 삶은 행복하다고 하셨다. 신체가 불편한 아내에게 항상 고마워한다고 했다. 항상 그랬다. 나의 호기심은 발동했다. 정말 그럴까? 실습 중에 어르신들과 함께 1층 강당에서 트롯영상을 본 적이 있다. 아마 입원실 전체 소독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때 오빠께 "요즘 트롯 가수 뜨는데 사모님은 어떤 가수 좋아하세요?" 여쭸다. 아내분은 딱히 좋아하는 가수가 없고 자신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에잇 서로를 좋아하고 사랑하지 다른 가수도 없단 뜻? 헐~ 이런!!! 그럼 다음 질문 "자녀분들은 말썽을 안 피우셨나요?" 평온한 가정이라도 자식들은 문제가 되었던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악마 같은 질문에 오빠는 "아내가 아프니 큰 화가 없이 그냥 넘어갔던 것 같아 아내한테 항상 감사해야 해!"라며 선한 답을 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들을 통해 어디서도 찾지 못했던 위대하고 자상한 남편을 보았다. 또한 후에 오빠의 가족 카톡방에서 본 아들과 대화 내용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행복하시는 모습에 존경합니다, ""아버지 존경합니다"로 시작되어 있었다.
여러분들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돈이 아닌 가족을 돌보기 위해 취득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희귀한 보석과 같은 아들과 남편, 아버지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서두르세요!!!
마지막 보따리는 도시락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께서는 연년생이었던 우리 도시락을 6개를 쌌다. 요즘은 도시락을 거의 싸지 않는다. 급식을 한다. 학교 급식을 하니 어른들은 편하다. 나도 어릴 때 잠시 거제도 동부국민학교에서 급식을 잠시 하다가 이사를 했다. 그때 삼계탕이 나왔는데 난 제대로 먹질 못했다. 다른 학생이 장난하듯 먹었다. 항상 급식은 빨리 후다닥 먹고 놀이터에 놀았다. 그 후 중학교 때는 도시락을 어머니께서 직접 싸 주셨다. 둘을 비교했을 때 난 힘드시지만 도시락을 싸주신 어머니께 감사했지만, 지금도 잘 먹지 못하는 삼계탕을 주신 학교 급식 담당하셨던 분께 감사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재 바쁜 직장인들의 아이들과 저소득층의 아이들을 볼 때 급식은 불가피한 건 사실이다.
애광원과 애광원 주간 보호센터에서의 8일간 점심은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다. 다들 김밥을 사서 먹어야겠다 했지만 8시 40분 전에 문을 여는 김밥집은 없었다. 각자가 준비해야 했다. 도시락을 통해 나를 포함한 그분들의 인생을 읽을 수 있었다. 저에게 도시락을 싸주셨던 보답으로 이번엔 제가 싸드리겠다는 딸을 둔 분 - 와! 부럽^^ 그래서 딸 딸 하는구나!, 같이 먹겠다고 큰 도시락에 반찬을 가득가득 담아 오신 분들- 우리는 식구였어^^, 아침마다 쿠팡에서 샐러드를 시켜준 아들의 도시락- 아들도 괜찮네!, 넌 힘드니까 싸 오지 마하면서 2-3인분 싸 오는 분- 한국인의 정인가?, 늘 고마웠다며 밤새 일하고 한숨 안 자고 만든 눈물의 도시락, 22명 중 누구도 받지 못한 어머니의 도시락의 주인공은 "나"였다.
이런 감동스런 도시락을 먹으면서 분단된 국가인 북한 주민들은 수령님께 감사하며 도시락을 먹을까? 급식을 먹을까? 궁금했다. 난 희한하게도 국수나 죽을 먹으며 아팠던 6 25 시절의 부모님들의 생활을 회상했고, 정성스럽고 푸짐한 음식을 보면 북한 주민들도 함께 와서 먹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다. 나만의 소중한 비밀을 또 여기에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