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나의 유년시절 향기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나 장소는 무엇인가요?
내 어린 시절 간식은 주로 논밭에서 나는 옥수수, 감자, 고구마나 딸기, 수박, 참외 같은 자연 그대로의 것들이었다.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을 도와야 했기에, 맏딸인 나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부엌일을 도맡았다.
아홉 살 때부터 직접 군불을 때어서 밥을 지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쯤에는 반찬과 간식도 제법 만들었었다. 그렇게 손맛이 야무졌던 데에는 엄마의 말씀도 한몫을 담당했다.
"여덟 살 네 오빠는 그 어린것이 밥에 호박국까지 끓여놨더라." 엄마가 무심코 던지는 그 칭찬이 어린 마음에 작은 돌멩이처럼 날아와 박히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말없이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길을 더 세게 지폈다.
오빠의 호박국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역시 연하가 만든 게 최고'라는 말을 듣고야 말겠다고, 붉어지는 불꽃을 보며 남몰래 다짐하곤 했다.
집에서 무언가 만들어 먹을 때면 주재료는 늘 밀가루였다. 아마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쉽게 상하지 않는 밀가루로 할 수 있는 요리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수많은 밀가루 음식 중에서도 가마솥에서 보글보글 끓여내던 팥 칼국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팥 칼국수를 만드는 과정은 정성 그 자체였다. 먼저 커다란 가마솥에 타닥타닥 장작불을 지펴 팥이 뭉그러질 때까지 푹 삶는다. 팥은 쉽게 눌어붙기 때문에 60센티미터는 족히 되는 나무 주걱으로 쉼 없이 저어주어야 했다.
잘 삶아진 팥을 체에 밭쳐 물을 부어가며 손으로 주무르면, 고운 앙금은 아래로 빠지고 껍질만 남는다. 시간이 넉넉한 날이면 밀가루를 아주 되게 반죽해, 몇 번이고 밀대로 밀어 쫀득해진 반죽을 얇고 고운 칼국수 면으로 만들었다.
반죽을 되게 할수록, 면을 얇게 썰수록 맛이 좋았기에, 마치 작품을 빚는 마음으로 공들여 반죽하고 같은 두께로 썰어내려고 애쓰던 기억이 난다.
걸러낸 팥물을 다시 가마솥에 붓고 불을 지피면, 이내 구수하고 달큼한 냄새가 온 마당에 퍼져나갔다. 팥물이 끓어오를 때 준비해 둔 칼국수 면을 넣고 잘 저어준 뒤, 소금으로만 간을 맞추고 동전만 한 기포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면 마침내 구수한 팥 칼국수가 완성되었다.
어른들은 여기에 설탕 한 숟갈을 넣어 푹 익은 신김치와 함께 드시곤 했는데, 그 맛은 정말 별미였다.
방학이 되면 팥 칼국수는 우리 집의 단골 메뉴였다. 20킬로그램짜리 밀가루 한 포대가 방학이 끝날 때쯤이면 동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번 가마솥 가득 끓여 놓으면 지나가던 동네 분들도 들러 스스럼없이 한 그릇씩 비우고 가셨다.
"아이고, 연하야! 오늘 팥죽 정말 잘 쑤었다, 맛나다!" 칭찬 한마디에 으쓱해지던 그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불을 지피느라 가마솥 앞은 늘 매캐한 연기로 눈물이 핑 돌고, 가마솥을 저을 때면 어린 어깨도 아팠지만, 어른들의 그 칭찬 한마디에 힘든 줄도 몰랐다.
들에서 일하는 어른들을 위해 하루 두 번의 새참과 점심을 챙기는 것은 주로 아이들 몫이었다. 품앗이가 흔했던 시절, 큰 대야에 음식을 이고 논밭으로 나르곤 했는데, 팥 칼국수는 그때도 빠지지 않는 메뉴였다.
물론 바쁠 때는 손수 민 칼국수 면 대신 소면을 넣어 끓였지만, 그것도 나름의 맛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큰아이를 임신했을 때, 별다른 입덧은 없었는데 유독 어릴 적 먹던 그 팥 칼국수만 생각이 나 사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은 가스레인지에 아무리 정성껏 끓여도 그 옛날의 깊은 맛이 나지 않는다. 무쇠 가마솥이라서 그랬을까, 아궁이 불 앞에서 눈물 흘려 가며 만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함께 나눌 사람들이 있어 그토록 맛있었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내게 팥 칼국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나눔의 기쁨과 칭찬의 힘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내 어린 시절의 다정한 스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