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마르고 170cm은 훌쩍 넘을 듯한 큰 키, 삶의 곤고함이 묻어나는 복장, 일흔은 족히 되어 보이지만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내딛는 다부진 발걸음, 나뭇가지를 직접 깎아 만든 듯한 기다란 지팡이.
등산로에서 종종 마주치는 그 할머니는 늘 무심한 듯 냉담한 표정으로 산을 오르곤 했다. 누군가와 좁다란 길에서 마주쳐도 길을 터주는 법 없이 늘 앞서 걸어 나갔고, 등산하며 건네는 간단한 인사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인지, 대답할 마음이 없는 것인지, 혹은... 상대방의 가벼운 호의도 담아낼 여력이 없는 것인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그 할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어디선가 본 듯하단 생각에 그 '어딘가'를 찾아 골몰하곤 했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늘 고개를 갸웃대며 산을 오르곤 했는데, 어제 비 올 상황을 대비하신 듯 기다란 우산을 움켜쥐고 오르는 모습을 보며, 그제서야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에 심취한 나는 그의 작품들을 모두 찾아가며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이 책이야 말로 나에겐 정말 향수 같은 책이 되어 버렸다. 읽고 나서도 은은한 여운을 남기고, 어린 시절을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마법 같은 책.
좀머 씨 이야기엔 좀머 씨가 주인공이 아니다.
유년시절을 보내는 어린 소년이 인생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좀머 씨가 소년이 바라보는 시선에 머물 뿐이다. 늘 텅 빈 배낭을 메고 기다랗고 이상한 모양의 호두나무 지팡이를 쥔 채 쉬지 않고 길을 걷는 남자. 그는 비와 우박이 세차게 쏟아지는 날에도 길을 걷고 있는 모습에 소년과 소년의 아버지는 차에 타라는 호의를 베풀지만, 그는 단호하고 절망적인 목소리로 지팡이를 땅에 내려치며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악천우에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건넨 말인데, 그는 죽지 않기 위해 걷고 있으니, 나의 생명에 치명적인 차량에 타란 말은 제발 하지 말란 뜻으로 대답한 듯했다. 그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소년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은 피아노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자살하기 위해 높은 나무에 올라섰을 때였다.
마침, 그때 소년은 좀머 씨가 걷기를 중단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시 나무 아래에 고단한 몸을 누이는가 싶더니 마치 온몸이 송곳으로 찔리는 듯 이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물과 빵을 급히 먹고 다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잠깐의 순간을 바라본 소년은 죽기 위해 올라간 나무 꼭대기에서 살기 위해 다시 나무 아래로 내려온다.
잠시나마 어처구니없는 일로 자살을 생각하다니.. 일생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저리도 힘겹게 온 힘을 다하며 버티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타인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꾸짖거나 나무란다거나, 혹은 꼭 바꿔야만 한다고 말할 자격이 나에게 있을까?
자신도 어찌할 수 없어 그냥 놔둘 수밖에 없는 삶도 우리 주위엔 충분히 있을 수 있는데...
내가 지금껏 살아온 좁디좁은 세상 속에서 경험하고, 생각하고, 바라보며 키워낸 생각으로 세상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기엔 세상이 너무 넓다.
이제부터 등산로에서 만난 그 할머니는 나의 좀머 씨다.
나는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순수한 어린 소년이 되어 그 할머니를 등산로에서 오래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