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은 선물이 가득한 날.
나는 비가 오는 날이 좋다.
우리 집 세 남자들은 비가 오면, 옷에 물도 튀고, 자전거도 못 타고, 신발에 물이 올라오고, 몸에 물이 닿는 게 싫고, 아침에 비 오다 그치면 젖은 우산도 챙겨야 하고... 무슨무슨 이유를 들이대며 비 오는 날이 싫음을 온몸으로 표현하지만. 나는 그들 속에서 유일하게 비만 오면 행복하다.
혹, 비가 오는 새벽에 가로등이 켜진 길을 걸어 본 적이 있나요?
저녁까지 비가 줄기차게 오다 새벽녘 즈음 빗줄기가 잦아들면, 가로등 길 밑으로 묘한 물안개가 퍼진다.
고등학교 때 시험기간이라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하다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은 내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로 손꼽힌다.
우산을 받쳐 들고 피곤한 눈을 비비며 하굣길을 나선 나는 가로등 길에 발을 내딛던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 모든 잠이 한 번에 달아나 버렸다. 넓게 퍼진 물안개와 가로등 불빛이 만나. 그곳은 마치 뮤지컬이나 연극의 무대 같았다. 나를 위해 잘 꾸며진 무대. 그 무대의 가로등 아래에 선 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었다. 우산을 쓰고 빙그르르 돌고, 발레를 하듯 점프도 해보며 너무나 행복했었다.
마치,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최고의 보상을 주는 듯했다.
이처럼 나에게 비 오는 날은 뜻하지 않는 많은 선물들이 주어지는 날로 기억되어 왔다. 출근길 정차하면서 마시는 한 모금의 커피의 맛도 다르고, 차창에 부딪히는 빗줄기도 멋스럽다.
출근길 회사를 5분여 남겨둔 대로변에서 커다란 컨테이너를 실은 차량이 천천히 진입했다. 나는 여유 있는 시간이라 천천히 컨테이너 차량 뒤를 따랐다. 나는 그곳에서 또 한 번 멋진 선물을 받았다.
컨테이너에 부딪혀 일렁이는 가로수의 젖은 나뭇잎들의 향연... 그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그것에 맞춰 흩어지는 물방울 들은 마치 바닷속 저 밑에서 심하게 일렁이는 바다 표면을 편안하게 감상하고 있는 착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아름다웠다. 세상에는 내가 보지 못한 아름다운 모습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지 못한 선물이 가득한 비 오는 날.
이래서 나는 비 오는 날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