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뜻하지 않은 선물이 가득한 날.

by 발돋움

회사에서 직원 건강검진을 하는 날이라 아침 6시에 출근을 해야 했다.

어제도 안전보건 강조주간이라 6시 조근을 했는데 오늘도 일찍 출근을 해야 하니 아침부터 몸이 천근만근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건. 오늘 비가 온다는 것.

나는 비가 오는 날이 좋다.

우리 집 세 남자들은 비가 오면, 옷에 물도 튀고, 자전거도 못 타고, 신발에 물이 올라오고, 몸에 물이 닿는 게 싫고, 아침에 비 오다 그치면 젖은 우산도 챙겨야 하고... 무슨무슨 이유를 들이대며 비 오는 날이 싫음을 온몸으로 표현하지만. 나는 그들 속에서 유일하게 비만 오면 행복하다.


혹, 비가 오는 새벽에 가로등이 켜진 길을 걸어 본 적이 있나요?

저녁까지 비가 줄기차게 오다 새벽녘 즈음 빗줄기가 잦아들면, 가로등 길 밑으로 묘한 물안개가 퍼진다.

고등학교 때 시험기간이라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하다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은 내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몇 안 되는 날 중 하나로 손꼽힌다.

우산을 받쳐 들고 피곤한 눈을 비비며 하굣길을 나선 나는 가로등 길에 발을 내딛던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 모든 잠이 한 번에 달아나 버렸다. 넓게 퍼진 물안개와 가로등 불빛이 만나. 그곳은 마치 뮤지컬이나 연극의 무대 같았다. 나를 위해 잘 꾸며진 무대. 그 무대의 가로등 아래에 선 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었다. 우산을 쓰고 빙그르르 돌고, 발레를 하듯 점프도 해보며 너무나 행복했었다.

마치,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최고의 보상을 주는 듯했다.


이처럼 나에게 비 오는 날은 뜻하지 않는 많은 선물들이 주어지는 날로 기억되어 왔다. 출근길 정차하면서 마시는 한 모금의 커피의 맛도 다르고, 차창에 부딪히는 빗줄기도 멋스럽다.


출근길 회사를 5분여 남겨둔 대로변에서 커다란 컨테이너를 실은 차량이 천천히 진입했다. 나는 여유 있는 시간이라 천천히 컨테이너 차량 뒤를 따랐다. 나는 그곳에서 또 한 번 멋진 선물을 받았다.

컨테이너에 부딪혀 일렁이는 가로수의 젖은 나뭇잎들의 향연... 그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그것에 맞춰 흩어지는 물방울 들은 마치 바닷속 저 밑에서 심하게 일렁이는 바다 표면을 편안하게 감상하고 있는 착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아름다웠다. 세상에는 내가 보지 못한 아름다운 모습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지 못한 선물이 가득한 비 오는 날.

이래서 나는 비 오는 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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