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둥글고 넓적한 400ml 보온컵 위로 드리퍼를 올린다. 여과지를 꺼내 신속하게 드리퍼 위에 얹고, 갈아놓은 원두를 붓는다. 어제 커피는 한 번에 툭 쏟아졌던 방대한 양의 원두에 별생각 없이 뜨거운 물을 부었더니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쓰디쓴 인생의 맛을 느끼고, 오랜만에 심쿵한 경험도 했던지라 오늘 원두를 여과지 위에 붓는 손길은 사뭇 섬세하다. 집중할 때 나오는 입술 쭉~이 나온 걸로 봐서.
적당량의 원두에 85도로 맞춰둔 물을 부어 본다. 처음엔 원두 높이만큼만. 그러면 원두는 구워지듯 살짝 위로 솟구쳤다가 천천히 아래로 진짜를 흘려보낸다. 매혹적인 향과 함께.
커피 향은 언제나 환영이다.
나는 한때 밥솥에서 뜸 들이는 냄새를 세상없는 구수한 냄새로 여겼던 날이 있었다. 아마도 시장기가 더해져서 그런 듯도 하겠지만, 이 냄새만큼 좋은 게 있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첫째 아이를 가지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속이 뒤틀리고, 비위가 상하다 못해, 당장 몸에 든 모든 것을 내놓으라는 강력한 지령을 받은 듯한 역한 냄새. 변심한 애인보다 더한 반전 냄새를 처음 느낀 후로 그 녀석이 출몰할 때쯤 한겨울 베란다에서 오들오들 떨며 점퍼를 뒤집어쓰고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라고.
커피 향도 그럴 날이 올진 모르겠으나, 요 쌉싸름한 녀석은 아직까진 사랑스럽다.
비 올 땐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들어주고,
감기는 눈을 쥐어뜯으며 공부에 매달렸던 옛날엔 피곤한 나에게 힘내라는 한마디 위로였으며,
덥고, 목이 타는 여름날엔 쪼그라든 세포하나하나마다 생명을 불어넣는 듯한 시원함에 눈이 번쩍 뜨이고,
외롭고, 추워 등뼈 줄기 따라 오돌오돌 소리가 나는 날엔, 시린 양손에 전해지는 온기 만으로도 든든함을 주는
시크하면서 따습고, 차가우면서 정감 있는 커피라는 너...
그래도, 너무 사랑하면 잠도 달아나고, 심장도 쿵쿵거리고, 골다공증에도 안 좋은 영향을 준다니...
하루에 딱 한잔만. 사랑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