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아들의 죽음.
월요일 아침 여직원 탈의실은 오는 사람마다 주말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푸느라 시끌벅적하다.
나는 일요일에 수영장을 아들과 갔다가 수영복 브라캡을 잊은 바람에 물속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는 얘기를 하며 한바탕 웃음꽃이 피웠다. 그때 직장선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고, 모두 아는 사람이었기에 선배는 스피커폰을 켰다.
"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얘기 들었어? 부고가 떴어! 차장 아들! "
순간 탈의장은 정적이 흘렀다.
많이 아프다는 얘기를 일주일 전에 전해 들었다. 입사 초 같은 부서에서 일한 직장동료라 회식자리와 사석에서도 몇 번 보았던 아이 었다. 똘똘하고, 이야기도 잘했던 키 작은 꼬맹이.
그 후로 동료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 아이가 자란 모습은 볼 수가 없었지만, 머릿속에 어렸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던 그 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은 그 아이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충격이었다.
아무런 말을 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쭙잖은 위로와 슬픔에 대한 이해는 모두 반감을 일으킬 것 같았다.
"왜 우리 아이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왜 나만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나?"라고...
하늘은 다 그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 같다. 그 말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은 다 이겨낼 수 있다는 전재가 깔려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무거워 무너져 내린 이들은 이겨낼 수 있는데 이겨내지 못한 나약한 사람들인가? 힘들어 지치고, 극심한 고통에 그 삶에서 내가 없어졌으면 하는 순간에도 나는 나약한 나 자신을 탓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한 삶인가?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 힘들 때는 무너지기도 하고, 무너진 김에 좀 쉬어갈 수도 있고, 그러다 쉬는 게 지겨워지면 일어날 수도 있는 내 삶. 그것을 꼭 틀렸다. 맞다라고 정의 내리고,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공식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일을 겪은 동료가 오로시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살다가 웃고 싶으면, '자식을 잃은 사람이 웃기도 하네'라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집어치우고 웃기도 하고, 살다가 울고 싶으면 '아직까지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저러고 있네'라는 나약하다는 편견은 무시하고 울기도 하며. 하고 싶은데로 내 마음이 가는 데로 편하게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힘든 마음을 감추고, 조금 편해진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지내지 말고, 하고 싶은데로 그렇게 해도 된다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꼭 말해 주고 싶다.
오늘, 아픈 마음을 당사자에게 표현할 길이 없어. 이 글을 쓴다.
고인에겐 아프지 않은 곳에서 힘들지 않고, 마음 편하게 잘 지내길 바라고, 그 가족에게도 하루속히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